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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기이택생 Jun 15. 2021

모래성이 무너졌다고 누가 파도를 탓하겠어

모래성도 방파제도, 파도가 아픈 것은 매한가지

1.


D와는 인터넷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시답잖은 SNS를 통해 소통하던 사이’였냐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대학원 생활을 오래 해오던 나는 돈이 궁했던 탓에, 한 웹페이지에서 숙제 대행 알바를 했었다. 질문자가 궁금한 문제나 귀찮은 숙제를 적당한 가격에 올리면, 나 같은 풀이자가 그 돈을 받고 문제를 풀어주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문제가 만 원 이하의 가격에 올라오던 와중에, 11페이지 분량의 프레젠테이션을 40만 원에 만들어달라는 요청은 너무나 눈에 띄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열댓 페이지의 슬라이드를 만드는 일 자체는 전혀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다만, 그 과제에 명시된 요구사항은 1997년 버전의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서식 파일을 사용해야만 온전히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제가 2016버전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 슬라이드는 똑같이 만들 수 없거든요. 혹시 1997버전 설치파일이 있으면 보내주실래요?”

“설치파일이 뭐예요? 수업 첫날에 조교님이 프로그램 깔아주셨는데.”

“아 그럼 혹시 원격제어는 할 줄 아시나요? 스카이프 설치하시고 원격제어 요청 수락하시면 제가 그 컴퓨터를 원격으로 사용해서 수정해드릴 수 있거든요. 그니까…”

“스카이프는 또 뭔데요? 회원가입 해야 해요?”


그녀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선택형으로 설치된 툴바를 대여섯 개 달고 있는 컴맹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내가 주저하고 있으니…

잘 모르겠으니까, 그냥 만나서 해주세요. 사는 동네도 가까운 것 같은데.



그렇게 대전의 카페에서 D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의 2년제 대학 모델과에 갓 입학한 스무 살의 학생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만들어준 발표자료는 그녀의 중간고사 대체 과제였다. D를 본 순간 호감을 느낀 나는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몇 차례 더 그녀를 만났고, 우리는 곧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모델 과에서도 슬라이드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나?”

“아니, 경찰행정학과 수업을 하나 듣고 있거든. 잘 맞으면 여름학기에 몇 과목 더 듣고 부전공하려고.”

“경찰행정학? 그건 또 왜? 앞으로 모델일 하는데 크게 도움 될 것 같진 않은데.”

“나 커서는 모델 일 안 할 거야. 어쨌든 대학은 가야 한다고 주위에서 하도 난리길래, 그냥 실기로 입학할 수 있을 만한 과에 적당히 지원한 것뿐이지 뭐. 내가 어릴 때 공부를 한 건 아니니까 몸뚱아리라도 팔아서 어찌 통과는 했는데, 동기들도 다들 성격이 얼굴값 해서 별로고 배우는 것도 재미없어. 오히려 행정법은 공부도 재밌고 실용적인 느낌이라 좋아.”


“너 며칠 전에도 쇼핑몰 모델 촬영하고 150만 원 받았잖아. 난 그 정도면 돈 버는 재미로라도 모델 일이 즐거울 것 같은데.”

“뭐 돈이 필요하면 가끔 모델 해서 벌 수 있겠지. 그래도 사람마다 각자 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과 재밌어서 하고픈 일은 대부분 서로 다르잖아? 난 법 관련 공부가 재밌더라.”


D는 나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자취방을 빼고 내 방으로 이사를 왔다. ‘함께 지내는데 굳이 방이 두 개일 필요는 없잖아.’ 라며, 어느 날 퇴근 후 내 방에 가니 그녀가 있었다. 그렇게 이사 온 날부터 그녀는 우리의 월세며 생활비, 방 보증금과 여가비 대부분을 혼자서 부담했다.

“야, 나도 돈 벌어. 하다못해 반반씩이라도 부담하자.”

“나보다 훨씬 못 벌잖아. 대학원생이 무슨 직업이야. 스물일곱 살에 월급 120만 원이면 대한민국 하위 10퍼센트쯤 아니야?”

“그래도 나는 학위도 같이 받는 거잖아.”


그래서 연구는 오빠의 업이야 덕이야? 덕업일치가 된 건 아닌 것 같고, 연구에 흥미를 잃었다고 내게 몇 번은 투덜댔잖아? 연구가 업이라 치면 지금 월급도 형편없고, 그렇다고 나중에 박사 학위가 떼돈 벌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구 때려치우고 나랑 어디 도망가 살자.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나 돈 많아.

그때 ‘어디 도망가 살자.’라는 말에 출렁인 내 가슴은, 몇 년이 지나고 D가 떠난 지금도 고요해지지 못한 채 잔잔한 파형을 그린다.




2.


동기와 친하지 못했던 D는 같은 과 2학년 언니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녀들의 술 모임은 한마디로 ‘돈 지랄’이었다. D를 포함하여 5명인 그들은 술자리를 가질 때면, 인당 30만 원 모아 현찰로 150만 원을 만들었다. 늘 가는 단골 칵테일 바 사장에게 그 돈을 주면 셔터를 내리고 그날 해가 뜰 때까지 가게를 본인들만 쓸 수 있었다. 잘생긴 남자 알바생과 사장 둘이 마감까지 값비싼 안주를 무제한으로 제공해주는 것은 덤.


“오빠, 진짜 힘들어서 그러는데 오늘은 나랑 같이 술 마셔주면 안 돼? 언니들 얘기에 맞장구치는 것만 해도 머릿속이 뿌예지는 기분이란 말야.”


어느 날 D는 애원하듯 내게 그 술 모임에 함께 가자고 말했다. 그녀들이 그렇게 큰돈을 쓰며 밤새 술을 마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학교 근처의 원룸 어딘가에서 대가를 받고 섹스를 하는, 일종의 ‘성 판매자’였다. 주에 5일은 일을 하는데, 넷 중에 누군가가 일하며 기분 나쁜 경험을 한 날이면 술 모임을 가지는 듯 했다. D는 그 모임에서 그녀들의 ‘남자들은 원래 그러냐’는 질문으로 시작해 ‘넌 우리 마음을 이해 못 해’로 끝나는, 늘 같은 레퍼토리의 신세 한탄을 들어주며 감정노동을 했다.


그 술자리에서 나의 존재는 그녀들을 격양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게 남자라는 성별을 싸잡아 흉보면서, 내가 스스로 ‘남자는 다들 성욕의 노예다’라고 선언해주길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오늘의 최고 진상 손님이 실장에게 항의하지 않도록 적당히 맞춰준 본인의 기술이라던가, 처음 보는 남자에게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건네받는 순간 그들이 얼마나 가학적이고 지배적으로 변하게 되는지. 각자가 일하며 겪어온 대단히 변태적인 행위들과, 그런 행동을 하는 남자일수록 오히려 직업이나 외모가 반반하다는 얘기…. 내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들의 경험담을 듣고 있자니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녀들은 내게 이런 얘기를 하나씩 꺼내놓고, 내 표정이 일그러지거나 미안해하는 눈치일 때마다 눈물까지 흘려가며 박장대소했다. 애초에 내가 뭐라고 맞장구 하는지는 중요치 않았고, 그저 내 머릿속을 잔뜩 헤집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대화의 목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들은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는 내내 뭔가 뱉어내고 싶은 게 입에 걸리는 양, 온 바닥에 계속 침을 뱉었다. 알바생은 아무 말 없이, 가끔 빈 병을 내갈 때 바닥을 마대로 닦아냈다.



네댓 시간을 세상과 남자들 욕을 하며 이어오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날이 밝아올 즈음 갑자기 끊겼다.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에 머릿속의 뭔가가 툭 하고 끊어진 양, 그녀들은 멍한 것인지 취한 것인지 모를 눈으로 허공을 보며 전자담배를 피웠다. 술자리의 주체자였던 J는 나와 D 사이로 담배 연기를 잔뜩 뿜어냈다.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빛, 너무 재수 없는 거 알아?”

“거슬렸다면 미안. D가 조금 피곤해 보여서 걱정됐거든.”

J는 갑자기 팔을 뻗어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나와 이마를 맞대더니, D와 내가 놀랄 겨를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빠는? 오빠는 지금 안 피곤해?”

“나야 뭐, 조금? 그래도 이런저런 얘길 들어서 재밌었어.”

J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재미? 뭐가 재밌었는데? 너 즐거우라고 한 얘기 아닌데? 내가 돈을 왜 이리 펑펑 쓰는 줄 알아? 그 짓 해서 번 돈을 바라보고 있자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그래. 그렇게 다 써버리고 나면 또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라서 모르는 남자랑 떡 치고. 오빠 눈에는 내가 재밌나 보지?”


J는 한껏 성을 내더니, 다짜고짜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에 내 뺨이 젖었다.

“이건? 나랑 키스하는 건 재밌었어? 어때 내가 한 번 대줄까? 십만 원만 들고 와.”

나와 D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나머지 술자리 멤버들은 늘 있는 일이라는 양,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바의 공기에는 여전히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오빠가 나보다 훨씬 더 불쌍해.

웃는건지 아니면 성을 내는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J는 돌연 내 처지를 들먹였다.

나이 먹고 돈 많이 벌거나 명예로우면 뭐 할 건데? 그래봤자 나 같은 여자랑 과거도 모른 채 결혼해서 돈이나 뜯겨가며 살텐데. 왜 바보같이 젊음을 팔아서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해? 지금 돈 백만 원 쓰는 게 오십 살 먹고 천만 원 쓰는 것보다 훨씬 재밌을걸? 내가 확인시켜줄까?”


D는 내게 울며 엉겨 붙은 J의 손을 잡아끌어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둘은 십여 분을 화장실에 있다 나왔고, J는 다시 나를 보며 서글서글 웃었다. J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부모님이 학과사무실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D에게 전해 들은 것은, 그 일로부터 일주일 즈음 지난 후였다.




3.


J가 사라진 이유는 따로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날의 내가 불쏘시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었다. 내가 한 말실수나, 여자친구 앞에서 그녀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은 것, 혹은 내가 그녀들과 섞이지 못한 채 외부인의 자세로 대화한 점… 뭐가 되었건 그녀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다면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하지 못하게 된 미안함은 응어리로 내 가슴 한켠에 맺혔다. J를 만난 날 이후로 늘 죄인처럼 미안한 마음을 숨기며 지냈다.



J의 실종만큼이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남은 그녀들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다. 술 모임의 그녀들은 여전히 같은 칵테일 바에 모여, D와 나를 초대하고는 손님들 뒷담화나 신세 한탄을 했다. 그녀들은 종종 있는 일이라며 J의 존재를 금세 잊은 듯이 말했다. 단지, 모임의 머릿수가 하나 줄어 각자 부담해야 하는 돈이 늘어난 것에 조금 짜증난 눈치였다. 그녀가 사라지고 보름 후엔, Y의 연락으로 모두가 모여 다시 술 모임을 가졌다. 그녀들은 그 술자리를 J의 간이 장례식이라 불렀다.


“돈 빌려서 잠수 타고, 남자 만나 도망치고, 대우 좋은 타지역으로 가거나 부모님이 정신병원에 보내버리는 경우도 있고... 이 세계에서 사람 한둘 사라지는 건 얘깃거리도 아냐. 아주 가끔은 사라진 이유를 알아보니 자살한 경우도 있었는데, J는 멘탈이 약하진 않으니 죽은 건 아닐 거야.”


Y는 전자담배를 꺼내 피우며 말을 이었다. 진한 오렌지 향의 담배였다.


“그래도 게 J는 이제 죽은 셈이야. 초등학생 때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J를 생각하면 느껴지는 감정이 엄마를 떠올릴 때랑 비슷해. 형태만 다르지, 내 관계가 끊어져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건 같거든. 그저 관계를 잃을 때 아파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면 돼. 이렇게 장례식 술 한잔에 털어내면 되는 거지.


J의 소식이 끊긴 후로 내내 마음이 무겁다는 내 고백에, Y는 걱정 말라며 본인 얘기를 했다.


“우리들은 온종일 좁은 방에서 지내니까, 누구나 다 우울증을 앓을 거야. 난 손님이 없을 때면 늘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음악을 틀어. 소리라도 방 안을 가득 채워야 덜 외롭거든. 우리 가게는 온 전등에 붉은 셀로판지를 붙여서 빨간 조명을 만들어 뒀는데, 그게 날 더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내 방은 내가 다 뗐어. 이제 붉은빛은 자동차 등만 봐도 싫어서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다니까. 우리는 조그만 방 안에서 매일같이 외로움이나 자기혐오와 싸우는 거야. 그러다 무너지면 스스로 사라지는 걸 택하는 거고. 모래성이 무너졌다고 누가 파도를 탓하겠어.”


그녀가 내뿜은 마지막 전자담배 연기는 곰팡이 핀 장판 같은 냄새가 났다. 훈연기에서 분리한 꽁초를 손끝으로 무심히 튕겨내며, Y는 말을 이었다.


현재를 즐기며 살아가면 결국 죽음을 가까이 두게 되는 것 같아.

미래와 현재를 둘 다 잡으면 좋겠지만, 그런건 능력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하잖아? 하루를 불태우듯 보내려면 생각보다 많은 걸 버려야 하거든. 낮에는 돈의 노예로 살다가 밤이 되면 왕처럼 쓰고, 미래에 대해 계획할 시간에 지금 뭘 하면 더 재미있을지 고민해야 하지. 능력 좋은 남자와 결혼생활을 꿈꾸는 것보다 몸 좋은 남자랑 섹스하는 게 더 좋아지고, 가방을 일시불로 살 때면 섹스할 때도 못 느껴본 오르가즘을 느끼게 돼.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허무해지는 거지. 불태우고 남은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걸 결국 깨우치게 되거든. 하루를 불태울 재밋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기분에 두려움도 느끼고."


Y는 언제부턴가 내가 아닌 그 뒤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J가 겹쳐보였다.


나도 요즘 더 이상 불태울 것은 내 자신뿐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어. 스스로 사라지는 걸 택하는 사람은, 아마 나 정도의 심정이겠지. 후회 없이 불태워보고 나니까, 딱히 죽고 싶은 건 아닌데 살고 싶은 이유도 없다. 뭐 이런거? 오빠도 언젠가 갑작스레 사라지지 않게 조심해.”




4.


그녀들의 술자리는 자연스레 없어졌다. J가 사라진 후로 점차 만나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약속한 모임 날에 한두 명씩 잠수 타는 일이 몇 차례, 그리고 끝이었다.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하나둘 단체 채팅방을 나갔고, 마치 함께한 모든 시간을 지워낸 듯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Y는 달랐다. 그녀는 ‘오빠가 무너지지 않았나 감시하러 연락했다.’는 우스운 첫인사와 함께 종종 내게 연락했다. D 역시 그녀와 자주 연락하며 친한 선후배로 지냈기에, Y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우리는 밥이나 술을 함께 하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우리는 사라진 J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함께 술을 마시다가, 셋 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랐을 때 별안간 Y가 꺼낸 아이디어였다.


“우리 J를 찾으러 가지 않을래? 걔가 어디 있을지 대충 감이 오거든.

“그래? 그럼 내일 당장 다녀오자. 이유가 뭐든 일단 J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


그렇게 우리는 흰색 중형차 한 대를 빌려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작은 차가 운전하기 편하다는 나의 말에, J를 찾으면 태워서 돌아와야 하니 차가 커야 한다고 D는 대답했다. J가 힘들 때면 찾던 곳이 있다며, Y는 한적한 시골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휴양림으로 지정된 숲길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한참을 걸어가니, 제법 널찍한 계곡이 나왔다.



“아무래도 이런 곳에 J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러게, J언닌 완전 공주과였는데. 벌레도 내가 대신 잡아줬다고.

“잔말 말고 일단 따라와. 계곡이 시작되는 저 산 꼭대기에, J가 휴가 때 종종 묵던 오두막집이 있어. 거기까지만 더 오르면 돼.


앞장서는 Y를 따라 우리는 잠자코 계곡을 거슬러 올랐다. 계곡물 옆길을 따라 걷기에는 산세가 점차 험해져서, 어느새 셋 다 신발을 손에 들고 계곡물에 맨발을 담그며 걷게 되었다. 발가락이 쭈글쭈글해질 무렵, 소라 껍데기 속 파도 소리를 닮은 울림이 들려왔다. 조금 더 걸으니 눈앞에 작지도 크지도 않은 크기의 폭포가 나타났다.


“여기야. J와 나의 대나무 숲. 여기서는 아무리 생각을 쏟아내도 폭포 소리에 묻혀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거든. 우린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말이 생기면 여기에 와서 풀어놓곤 했어.


J가 여기에 없을 거라는 내 생각은 폭포를 마주할 즈음 확고해졌다. 아니, 애초에 J가 이 장소를 알기나 할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이곳까지 온 김에 나도 대나무숲을 사용해보고 싶었다. Y가 폭포를 향해 몇 걸음 더 내딛는 동안, 나는 외쳤다.


J야- 전화라도 받아라! 뭐가 됐건 내가 다 미안해!

그래 J언니! 언니 맘 몰라줘서 미안!

D도 나를 따라 폭포에 소리쳤다. 나는 장난스레 한두 마디 더 외치고는 Y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렇게 하면 돼?


Y는 나를 등지고 폭포를 바라보며 잠자코 서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메아리가 잠잠해질 무렵...

그래도 살아가겠어-!

잠시 후 다시-

살아내겠다고-


Y는 짧은 두 마디를 쏟아내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니 Y는 뒤를 돌아 우리를 마주하였다. 우리보다 몇 걸음 더 폭포에 가까이 서 있던 그녀는 폭포가 만들어낸 물보라에 축축이 젖어있었다. Y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가자. 오늘 J는 안 올 모양이야.


Y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나는 제자리에서 뒤로 돌아, 나를 지나쳐 계곡 길을 내려가는 Y를 그저 바라보았다. 그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의 뺨에 맺혀있던 것이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물보라였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그때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파도에 부서지고 있는 모래성인지, 아니면 파도를 찢으며 울부짖게 하는 방파제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모래성도 방파제도, 누구나 살아내는 게 아픈 건 매한가지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5.


폭포를 마주하고 난 날 이후로 매일을 고민하며 지냈다. 처음엔 내가 과연 모래성인지 방파제인지를 고민했다. 그 고민은 점차 파도를 이겨낼 방법에 대한 궁리로 바뀌었다. 결국 누구에게나 파도는 아프게 몰아치고, 나는 모래성인 것 같았다. 내가 파도를 대할 방법은 그를 피해 숨거나 무너지거나, 오직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 밤, 기숙사에서 홀로 소주에 편의점 족발을 먹다가 노트북 충전선을 감아 스프링클러에 목을 맸다. 파도에 무너진 채로 사느니 세상에서 숨어버리는 것을 택한 것이다.

목이 아주 아팠다. 죽음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지 않았고, 아픔에 몸부림치는 것은 내가 아닌 무의식의 것이었다.


팟- 쏴아….


하늘이 나를 살려준 것인지, 아니면 사실 내가 죽고 싶지 않아 스프링클러에 목을 맨 것인지…. 꺾인 것은 내 목이 아니라 스프링클러였다. 나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고, 굵은 물줄기가 온 방 안과 복도를 적셨다. 감전이라도 되어 죽어버리자는 생각으로 바닥에 넘실거리는 물 위에 드러누웠다. 붉은 녹물을 뿜어내는 스프링클러 소식에 헐레벌떡 뛰어오신 사감 선생님은 내 목의 상처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사감실로 보냈다.


곧 지도교수님과 상담사분, 부모님과 학생처장님 등 여러 사람이 나를 찾았다. 몇 차례의 상담과 면담, 사감 선생님의 달콤한 차 한 잔과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여러 장의 각서를 쓰며 수십 차례 말하기. 그게 전부였다. 대학에 입학하고 가장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던 짧은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 후로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왔는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를 죽이는 대신 하루하루를 죽여가며 지내다 보니, 이 나이가 되었다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여전히 찾지 못하고, 무언가를 또렷이 바라볼 의욕조차 잃은 채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지냈다. 이제 나는 모래성도 방파제도 아닌, 시간이라는 파도에 오래 휩쓸려 파고가 닿지 않는 심해 밑바닥에 가라앉은 모래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면 D와 보냈던 밤들을 떠올렸고, 사라진 J와 눈물짓던 Y를 그리워했다. 그녀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울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디로든 도망쳐 살자 했던 D의 말을 들었더라면….이라거나 Y를 따라 폭포를 보러 가지 않았더라면….하며, 내 선택에 대해 수없이 자책했다. 어쨌든 나는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있고, 그녀들은 아무도 내 곁에 남아있지 않다.




지독하게 싫은 내일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휴대폰 알람시계에, 언젠가 이런 문구를 적어넣었다.

모래성이 무너진게 파도 때문이라고, 그 누가 이해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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