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많긴 하지.” B는 내 화제 전환을 장난스레 받아넘겼다. “Y 알지? 걔가 우울증에 걸려서 힘들어할 때 내가 걔한테 이런 말을 했었어. ‘나는 우울증을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오빠답네. 과하게 직설적이야.” B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어. 약은 질병의 원인을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우울증약은 그저 기분을 좋게 하는 약한 마약일 뿐이라, 병의 원인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애초에 우울증은 질병으로 분류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고, 치료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청국장의 맛이 짜게 느껴졌다. 잠시 말을 멈추고 감정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 당시 Y는 제출이 30분밖에 안 남은 과제를 시작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다가, ‘될 대로 돼라’하며 게임을 해버리는 식이었으니까. 게다가 수업도 제때 나온 적이 거의 없고, 결석도 잦았잖아. 그래놓고는 약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느니, 약과 함께 담배를 피우면 효과가 최고라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니까. 그때 내 눈에는 Y가 충분히 학업을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의지가 부족하고 나태해서 망가져 버린 것처럼 보였어. 우울증이란 게 심해봤자 온종일 아무것도 안 하는 그 모습에 대한 변명거리가 될 순 없다고 생각했지.” “그 오빠도 좀 극단적인 경우긴 했지.”
“그런데 지금 내 상황이 그때의 Y와 똑같아. 열정이 다 식어버려서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 해야 할 일을 안 한 채로 출근해서 잔뜩 욕먹을게 뻔한 내일을 상상하며, ‘오늘 잠든 채로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어떻게 과거의 나는 큰 열정을 가졌었는지 되묻기만을 반복해. 참 아이러니하지?”
B는 수저를 내려놓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깊이가 느껴지는 눈이었다. “우리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도 나누었잖아? 사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이제 없다고 생각해. 차라리 약을 먹어보는 게 어때?” 나는 수저를 더 꽉 쥐며 대답했다. “나도 이제 우울증이 현대인에게 흔한 질병이란걸 인정해. 그리고 우울증의 원인은 외부의 비판이나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과잉긍정이라서, 혼자서는 치유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약을 먹기는 싫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알 필요 없는 추상적인 이야기야. 더 현실적인 얘기를 해 볼까? 우리나라에서 정신과는 처방기록뿐 아니라 진료기록도 평생 남는대. 약을 먹었다는 기록이라도 있으면 보험가입이나 취업 같은 ‘문턱’들이 높아진다는 말도 있고. 이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아직 우리나라에서 ‘정신과 진료 기록’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잖아.”
“아직 우리나라에서 ‘정신과 진료 기록’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잖아.” (그림: 조선일보)
“나한테 이런 얘기를 털어놓는 건 도움이 돼? 최근엔 나도 많이 지쳐서 오빠 말에 제대로 공감조차 못 해준 것 같은데.” “내가 네게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선 내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낼 만큼의 꽤 큰 용기가 필요해. 게다가 내가 가진 우울증에 대한 생각을 부정하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기도 해야 하고. 너를 만나는 이 순간은 두려움과 편견에 갖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맞이하는 축제 같은 거야. 그래서 네게 이런저런 말을 하는 매 순간은 즐거움이야. 억누르기만 했던 생각들을 온전히 해소하는 기분이지.”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도 덜 미안해지네.”
“그리고 내 상태에 대한 나의 생각이 변했듯이, 너의 생각도 바뀌었으면 좋겠어. 우울과 맞서보니까 이 증상은 나 스스로가 인정하고 가치관을 바꾸는 것 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겠더라고. 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려고 하는데, 굳이 애쓸 필요는 없어. 물론 네 조언 덕분에 내 마음먹기가 크게 바뀔 수 있었기에 늘 고맙지만, 애초에 그런 조언들은 우울이라는 증상 자체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거든.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내 곁에서 이야기를 듣다 잠들어도 좋으니, 그저 내 가슴이 답답할 때 곁에서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주는 거야. 감기에 걸린 친구에게 매일같이 뭐 먹어봐라, 뭐 하지 말아라 하기보다는 그저 가끔 ‘감기는 좀 나았어?’ 하고 물어봐 주잖아? 나에게 필요한 도움 역시 그 정도라고 생각해.”
“그런 일이야 나보다 잘 해줄 사람 또 없지?” “그렇지. 사실 지금도 참 고맙다.” “뭐가?” “같이 청국장을 먹으면서 우울함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여자 사람 친구가 있다는 게.” “헛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B의 말에 비로소 숨을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식은 청국장이라도 밥에 비벼 먹으니 꽤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