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가끔씩 ‘나는 이공계에 진학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고 후회해.”
상이 다 차려지기도 전에 나는 이야기를 꺼냈다. 가슴에 무언가 사무치는 기분이 들어 아플 지경이었다.
“왜? 난 너의 그 똑똑한 머리가 늘 부러운데. 넌 문제를 보면 답을 아는 유형의 사람이잖아. 완전 이공계 학도지.” “똑똑한 사람이 이공계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 우리처럼 평생 공부하며 살 사람들은, 두뇌의 명석함이나 학문적 성향이 아니라 본인의 성격에 따라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것 같아. 본인의 감정에 동요가 크게 있는지, 성격은 이성적인지 아님 감성적인지를 잘 생각해서 이공계나 인문계, 예체능과 같은 방향성을 선택하는 거지.”
“음… 생각해보면 나도 들쑥날쑥한 기분 탓에 공부에 집중 못한 적이 많아. 시험 전날 밤에 기분이 별로라고 공부는 안 하고 영화를 보러 가버리기도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심리상태가 공부를 비롯한 지적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꽤 큰 것 같네.” “맞아. 너도 감정이 자주 물결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지. 나는 내 자신을 너보다도 마음이 크게 출렁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주변 이공계 친구들 중에서 이렇게 감정적 변화가 큰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나는 심지어 아침 출근길에 하늘이 맑으면 기분이 한없이 좋아져서 핸드폰으로 구름 사진을 마구 찍다가도, 연구실로 걸어가는 중에 이어폰에서 슬픈 음악이 나오면 또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해. 게다가 그러한 감정들은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날 찾아오는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물결일 뿐이라서, 내가 행복하거나 슬픈 이유를 잘 모르겠는 경우가 많아.”
“그러한 감정의 잦은 변화가 공부에 꼭 안 좋기만 할까?”
C는 비어있는 내 소주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내 경험상 적어도 학부생 수준의 공부까지는 이런 감수성이 오히려 장점이었어. 감정적 ‘고점’에 도달했을 때의 내가 공부에 투자할 수 있는 열정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할 때 하고 놀 때 노는 ‘효율적인’ 공부를 했던 거지. 그런데 연구를 해 보니 이런 폭발력보다는 꾸준함이 훨씬 중요하더라고. 지도교수님도 내 이러한 습성에 대해 파악하셨더라. 어느 날은 나를 부르시더니 ‘너는 아이디어도 좋고 결론도 잘 도출하는데, 전체적인 연구 과정에 기복이 심한 것 같다.’ 하시더라고.” 부위별로 맛의 차이가 확연하게 다른 방어회를 먹다가, 문득 내 성격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이 났다.
연구를 해 보니 폭발력보다는 꾸준함이 훨씬 중요하더라고. (그림: 굿라이프)
“그래도 연구 능력에 고점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다른 사람들보다 큰 잠재력을 가졌다는 뜻 아니야?” “아쉽게도 이러한 능률의 고점을 훨씬 더 이롭게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이공계가 아니라 인문계 혹은 예체능 계열일 거라 생각해. 게다가 그런 분야에서는 이런 감정의 물결을 본인의 개성이자 능력으로 계발하고 발휘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 학생 시절에 진로적성검사 해 보면 ‘감수성이 풍부하다.’라거나 ‘기분파이다.’ 하는 선택지들이 많잖아?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공계와는 정반대의 직군을 추천해주고. 심지어 난 창조적 활동의 희열도 조금은 경험해봤거든. 나 학부생 때 ‘뮤지컬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거든? 내가 직접 창작한 뮤지컬로 무대를 꾸며야 하는 수업이었는데, 그때 창조적인 예술의 쾌감과 아름다움을 마음껏 경험했었어. 게다가 내 감정의 고점과 저점을 연기와 노래로 승화시키고 무대 위에서 여과 없이 표출하는 과정은 엄청난 희열 그 자체였지. 그 이후로 미술 동아리, 오케스트라, 문학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보며 감정과 이공학의 관계에 대해 토의하고 사유해보기도 했는데, 이공학적 성취도가 높으려면 감정적으로 평온해야 한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 반대로 내가 감정 변화의 폭이 큰 사람이란게 다른 분야에선 재능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를 애꿎은 분야에서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언제부턴가 C가 내 눈을 지그시, 또 오래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나 혼자 너무 떠들었나 싶어 술잔을 비웠다.
“재능의 낭비라고까지 생각해왔던 거야? 이공계 분야에서 감수성과 같은 재능을 활용해 볼 방법은 없을까?” “글쎄, 이래저래 고민은 해 봤지만, 아직 뾰족한 방법을 찾진 못했어. 그저 내 진로선택 안목이 좁았던 것에 안타까워할 뿐이지. '내가 감정선의 변화가 큰 사람이란걸 일찍 알았더라면.', '감정적인 동요가 큰 사람은 인문계나 예체능 계열에서 큰 장점을 가진 셈이라는 걸 누가 미리 일깨워 줬더라면.' 하고. 물론 이런 소모적인 후회 말고도 이런저런 고민을 해. ‘이미 시작한 박사과정이니까 성의껏 잘 마치고, 배우나 요리사로 제2의 삶을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라거나, ‘내 삶이 지금과는 반대 분야에 자리 잡아야 내가 비로소 행복해지지 않을까?’ 뭐 그런 뒤늦은 진로 고민 말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꼭 찾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