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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기이택생 Jan 06. 2021

“난 인간의 수명이 너무 길다고 생각해.”

B와의 치킨에 맥주

“난 말야, 인간의 수명이 너무 길다고 생각해.”



“갑자기 훅 들어오기야? 이번엔 또 뭐가 오빠를 괴롭히는데?”
B는 갑작스러운 내 화제 전환에 손에 들고 있던 닭 다리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나는 심각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그렇지 않아? 쳇바퀴 인생이 되고 나니 하루하루도 죽도록 지겨운데, 앞으로 70년 정도나 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세상에.


“왜? 난 하루하루가 재밌어. 출근해서 세포들 밥 주는 것도 재밌고, 논문 읽어서 노트에 정리하는 것도 즐거워. 하루를 마치면서 ‘오늘도 수고했다 B야.’ 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도 뿌듯하고.”

“도대체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은 어디서 계속 솟아나는 거야? 진짜 그런 기질은 타고나야 하나 봐. 나도 마음으로는 하루를 대하는 네 자세를 본받고 싶어. 하지만 난 반복적인 삶을 잘 견디지 못하는 걸.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 죽어가는 기분이야. 매일 뭔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새로운 난관을 맞닥뜨리고 싶어. 이런 틀에 박힌 인생이 반백 년도 더 남았다니…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뭘 해도 결국엔 지루해질 거야.”


“안정감과 꾸준한 성취도 만족감을 주잖아. 아니면 시간을 들여 꼭 해보고 싶은 일 같은 거 없어?”

“글쎄... 사실 터무니없는 걸 제외하면 더 해보고 싶은 일도 없어. 굳이 꼽자면 아벤타도르 같은 드림카를 사서 도심을 질주한다거나, 무중력을 체험해보는 거 정도? 매일의 반복이 주는 안정감은 내가 그 하루를 살아간 게 아니라 죽어간 것처럼 느끼게 해. ‘어차피 언젠가 죽을 텐데, 내 남은 날들 중 또 하루를 어제처럼 흘려보내며 낭비했네.’ 하면서. 만약 내가 그 옛날처럼 길거리에 탱크가 활보하고 다니는 시대에 살았다면, 난 웃옷을 벗고 거리에서 거대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탱크를 막아서는 사람이 됐을 거야. 난 내 삶을 멋지게 쓰고 싶어. 내가 인생에서 가장 멋지고 건강할 시기에 나 자신을 불태우다가, 병들고 약해지는 시기 없이 빠르게 사그라지고 싶다고. 내가 늘 하던 말 기억해?”

“무슨 말?”

“스물다섯쯤 내 이름으로 논문을 써서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나의 흔적을 남기면, 친구들을 다 초대한 내 생일파티를 저 멋진 풀 빌라에서 열 거라고. 그 순간이 내 삶에서 가장 반짝이는 때일 테니까, 파티에 온 친구들에게 내 논문을 나눠주며 기쁨에 겨운 채 목숨을 끊고 싶다고.”

B는 내 말을 가볍게 들어 넘기며 내게 건배를 청했다.


“아 맞네. 오빠 진짜 싸이코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B의 태도 덕분에 내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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