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기이택생 Mar 29. 2021

“목덜미에 점이 8개 있더라고.”

B와의 튀김에 맥주

나와 전여자친구의 마지막 만남은 대로변 사거리의 스타벅스 창가 자리였다. 그녀는 미안하다며 울었고, 나는 멍한 눈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몇 개의 점이 있는지 세어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 담담함이 번졌을 무렵, 우리는 헤어졌다.



“목덜미에 점이 8개 있더라고.”



“그 와중에 점이 몇 개인진 왜 세고 있었어? 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

B는 테이블에 놓인 내 맥주잔에 자기 잔을 부딪치고는 혼자 술을 마셨다.


“왠지 ‘이 모습이 마지막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후부턴 정신없이 그 순간을 눈에 담으려 했을 뿐이야. 걔는 무슨 음료를 시켰지? 네일은 무슨 색이지? 다리를 꼬고 앉았나? 손에 쥔 저 티슈는 내가 가져다줬던가? 점이 몇 개인지는 매번 끝까지 세질 못해서, 항상 궁금했던 거야.”

“그분은 엄청 서운했겠다. 울고 있는데 위로해주진 못할망정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을 거 아냐.”

“애초에 내가 위로할 마음이 없었던 거지. 이미 헤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만났거든. 걔가 무슨 말을 하는진 신경도 안 쓰이더라. 그런데 점을 다 세고 나니까, 갑자기 미안해지더라고. ‘많이도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목덜미에 점이 몇 갠지도 모를 만큼 소홀했던 건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많이도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목덜미에 점이 몇 갠지도 모를 만큼 소홀했던 건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



“에이, 그건 부모님도 모를걸? 사랑이랑 뭔 상관이야.”

“그 사람의 사소한 것도 기억해주는 게 사랑이잖아? 이별의 순간 나는 스타벅스에 앉아서,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지난 기간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거지. 사실 내가 미안함을 느낀 대상은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머릿속으로는 오롯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것을 소중히 기억해주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오오, 그럼 이번 상대에겐 미련 따위 없는 거야?”

B는 자신이 나보다 누나라도 된 양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련은 무슨, 그냥 좀 지쳤어. 자신에게 좀 실망하기도 했고. 사랑도 일종의 에너지라, 우선 내게서 넘쳐흘러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몸이나 마음이 피폐해져서 에너지를 담을 그릇이 작아지면 나눠줄 사랑도 적게 담기겠지? 당분간은 삶의 여유도 좀 누리고, 내 그릇도 키우는 데 힘쓰려고.”

“연애 못 하는 핑계치고는 그나마 그럴싸했다. 그럼 나는 오빠 소개팅 안 해준다?”

“어이구? 언제는 해준 적 있는 것처럼 말하네. 관둬라, 관둬.”

이별로도 성장할 수 있다면 이번엔 제법 큰 경험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나는 맥주잔을 비웠다.

이전 05화 “난 인간의 수명이 너무 길다고 생각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