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씩 내가 갉아먹혀가는 것 같아
"선배.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
"아니, 약속은 없는데, 왜?"
"그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녁이나 하러 가시죠."
대팔은 뜬금없이 선배에게 저녁 약속이 있냐고 물었다.
며칠째 쌓인 피로가 말보다 앞섰다. 그냥 누군가와 말을 섞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대팔은 선배와 자주 가는 술집으로 향했다.
맥주가 몇 잔 돌았다. 둘은 말없이 술잔을 부딪히고, 안주를 하나씩 먹고, 다시 맥주를 부딪히고, 다시 술잔을 부딪히기를 몇 차례, 선배가 결국 말문을 먼저 텄다.
"대팔아, 이렇게 둘이 술 먹는게 얼마만이냐."
"저희 1년에 한 번은 이렇게 먹잖아요. 뭘 새삼스레."
"야! 작년은 연초였고 올해는 지금 늦가을이잖냐. 너 반성해 시키야"
"그래서 오늘 선배 왔을 때 바로 물어본거잖습니까. 시간 되시냐고."
선배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각자가 바빴기 때문이었고, 늘 약속을 잡는건 대팔이 먼저이긴 했다. 본사에서 명품 MD 담당자로 근무를 한다는건 많은 약속에 시달린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기도 했다.
"미오나르에서 저랑 일 못하겠대요?"
"아마 준성 팀장님도 내용 아실걸? 근데 팀장님은 대팔이가 알아서 해결 잘 할거라고 하시더라고. "
"역시, 우리 팀장님밖에 없네. 미오나르에서 뭐가 문제래요?"
"뭐, 스타일링 클래스 협조 받는 것에서부터 해서 팝업 스토어 전개하는 것도 너무 원론적으로만 답변을 한다. 유연성이 없다고 하고, 이래저래 협조가 잘 안된다고 썼더라."
대팔은 술을 한 잔 털어넣더니 선배에게 물었다. "그 이야기를 누가 해요? 담당자? 그 윗사람? 아님 지사장?"
선배도 술을 털어넣더니 쓰다는 듯이 "크으" 하고 나직이 말하고는 답했다.
"지사장이 공문도 보내고 전화도 하고."
"그 아저씨 여전히 그러시나보네."
대팔이 그 아저씨라고 하는 사람은 미오나르의 지사장이었다.
대팔에게 늘 "친한건 친한거고 일은 일이지요!" 라고 외치면서 실무자들이 이래저래 잘 안풀린다고 보고를 하면 다이렉트로 대팔의 윗사람들을 건드려서 대팔을 힘들게 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오나르 지사장과 대팔은 1년에 두 세 번은 술자리를 가졌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업무를 할 때는 오히려 더 대팔에게 엄격해 보이는 미오나르 지사장이었다.
"그래서 미오나르에서는 저보고 어떻게 해달래요?"
"뭐, 자기들도 내년 상반기에 큰 돈을 들여서 하는 팝업인데 최대한 자기들 하고 싶어하는대로 해달라는거지 뭐."
"그럼 쟤네 해달라는대로 해주는건 그렇다 치고, 다른 브랜드에게서 받는 컴플레인은요? 점장님이 뭐라고 하는거야 제가 커버 치겠는데, 다른 브랜드에서도 백퍼센트 난리를 부릴 거 같은데요?"
"대팔아"
선배는 술을 마시려다말고 술잔을 놓으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너랑 1년에 최소 한 번은 술을 마시는데, 점점 대팔이 네가 더 이성적이고 냉정해지기만 하는 거 같다. 이번 일은 그렇게 가이드라인, 팩트 이런 것으로만 이야기할 게 아니야. 때로는 이성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도 해야되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판단해서 각 협력사나 매장이나 커뮤니케이션을 해야지. 아무리 네가 감정소모하는게 힘들다고 해서 그걸 등한시하면 안돼."
그 말이 맞다는 걸 대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마음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형 맞아요. 맞는데."
대팔은 갑자기 앞에 있던 맥주에 소주를 타다가 한 잔을 쭉 마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제가 요즘 사춘기라도 왔나 봅니다. 감정소모 하는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특히 명품 얘네들은 내가 먼저 다가간다 한들 쳐다보기나 하나 싶고, 저 원래 그렇게 친해지는거 정말 좋아하던 놈인데 이제는 그게 참 어렵네요. 제가 10년 넘게 하던 일인데 이 일에 대해서도 좀 생각이 많아지구요. 어쨌든 미오나르 건은 제가 사과 전화 드리고 잘 해결을 할게요."
대팔은 선배와 헤어지고 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눈만 꿈뻑꿈뻑한 채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쨌든 자기 때문에 미오나르의 지사장까지 난리를 쳤다고 하니 해결은 해야할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참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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