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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28주. 캐롤(2016)

2020. 01. 12. by 감자

글을 시작하기 전에 노래 한 곡을 먼저 불러보겠다.     


시간 엄수 써 놓고

준엄히 언약 해 놓고

나는 늘 핑계를 대네

(안 돼 안 돼 그럼 안 돼)오우 예

당신의 너른 마음 안에서

우리의 2020년은

오, 우리의 2020년은

조금 천천히 시작되었네요     


이제 바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겠다.


사실 나는 작년 연말에 1월 1일까지 닷새간 휴가를 얻었는데 이건 지금 일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얻는 긴 휴가였다. 처음 휴가를 얻었을 때는 잠깐 동안 설렜다. 어딘가에 여행을 가야 할 것 같고 일본 비행기를 알아봤다가 강원도 여행을 찾아봤다가 전국투어 일정을 짰다가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귀찮게 느껴졌다. 해야 할 일은 잔뜩 있고 휴가 동안 혹시 학원에 문제가 생기거나 학부모의 연락이 오거나 하면 내가 멀리 여행을 가 있는 것이 후회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여행을 가서 생길 그 모든 비일상을 겪어 낼 상상을 하니 피곤해졌다. 여행이라는 것,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말았다.


그리고 휴가날이 되자 나는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광안리와 해운대를 낮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집에는 휴가라고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강제로 오전부터 저녁때까지는 밖에 있어야 했다. 어쩐지 이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서 익숙한 곳을 다니면서 쉬고 싶었다. 가방에 책 한 권을 넣어가지고, 무선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로 노래를 듣고, 가끔 포켓몬을 잡으면서 계속 걸었다. 우리 집에서 수영강 강가를 따라 센텀으로, 민락 수변공원으로, 밤의 해운대로, 대중교통을 타지 않고 걸었다. 맛있는 와플 집을 찾아서 잠시 길가에 서서 바삭바삭 먹으며, 소멸해가고 있는 구 해운대 시가지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정처가 없었기 때문에 몸이 익숙한 곳으로 갔다. 다리가 아파서 식당에 들어가고 카페에 앉았다. 그렇게 사흘 동안 50km 정도를 걸었다. 원 없이 걸어 다닌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1월 1일 아침이 되자 오른쪽 발목이 아팠다(지금도 아프다…).


그렇게 휴가를 끝내고 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혼자 걷는 건 이제 많이 했어. 혼자 걷는 건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확실한 즐거움이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요즘 제일 마음이 끌리는 노래를 듣는 건 나를 틀림없이 행복하게 하는 일임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래도 난 이미 충분히 혼자 많이 걸었어.

자, 그러면 앞으로는 뭘 해야 하지?


12월 31일 밤, 한참을 걷고 집으로 들어와 뻐근한 발목을 주무르며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캐롤’을 보았다. 영화 제목은 ‘캐롤’이지만 이 영화에서 캐롤보다 매력적인 인물은 테레즈라고 생각했다. 우연한 첫 만남 후 테레즈는 캐롤의 묘한 매력을 계속 떠올린다. 그리고 캐롤의 플러팅에 설레고, 캐롤의 데이트 신청을 곧장 받아들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시종일관 흘리고 있는 캐롤에 비해 테레즈는 긴장하고 어색하게 웃고 수동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남편과 지지부진한 별거를 이어가던 캐롤을 움직이게 한 것은 테레즈라는 존재였다.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만든,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삶의 궤적이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 때가 있다. 오늘도 코를 질질 흘리며 침대에 누워서, 어느덧 내가 37살이 되었음을 떠올렸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4년만 지나면 나는 40대가 되고, 빼도 박도 못하고 장년의 세계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비혼으로 원가족과 함께 살 것이고, 아이는 갖지 못할 것이고, 시작한 사업을 계속해서 굴려 나가려고 노력을 할 것이며, 어쩌면 사업을 접고 과외를 뛰고 있을 수도 있으며, 엄마의 노쇠와 동생의 나이 듦, 그리고 내 육체의 마모에 괴로워할 순간이 잦을 것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에 나의 미래가 들어와 있다는 감각은 별로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권태란 모든 것이 쉬워질 때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곰곰이 상상해 보니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권태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 힘겨워서 다른 변화를 줄 여유가 없을 때 생겨나는 것이었다. 현실을 근근이 버티고 있을 때, 그래서 내게 지금과 다른 인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릴 수 없을 때 권태는 생겨난다. 그렇게 때문에 권태를 없애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이다. 


백화점에 딸아이의 선물을 사러 온 캐롤은 권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장갑을 벗어 들고 습관적으로 웃음을 짓는 캐롤에게 테레즈는 끌림을 경험한다. 그것이 사랑의 신비로운 점이다. 자신이 권태로워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도 어떠한 타인은 사랑을 느낀다. 물론 ‘손님, 저건 케이트 블란쳇이에요’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만.


캐롤을 움직이게 한 것은 테레즈다. 캐롤이 사랑하는 딸이나 미워하는 남편, 오랜 신의가 쌓인 애비가 아닌, ‘새로운 사랑’인 테레즈. 새로운 사랑은 힘이 강하다. 사람을 변화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강력한 동력원이 된다. 무작정 함께 길을 떠났던 두 사람은 현실의 일들을 모두 잊고 상대와 새로운 풍경에만 집중한다. 거기서 캐롤은 힘을 얻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야겠다는 계획은 없다 하더라도 일상을 전복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테레즈를 버려두고 홀로 일상으로 돌아간 것은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서로를 권태로운 일상에서 각성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캐롤과 테레즈 관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테레즈 역시 캐롤과의 여행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듬뿍 얻지 않았던가.


2020년에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은 무엇이 있을까? 부디 좋은 것이기를 희망한다. 당신에게도 강한 힘을 가진 새로움이 찾아오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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