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좋은 취미, 좋은 운동 정도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수준을 넘어 글쓰기와 함께 인생의 도전 영역이 되었다
지긋지긋 저주받은 신체 조건과 운동 능력을 특유의 꾸준함, 포기하지 않음으로 일관했더니 이제는 '발레하는 것' 처럼은 보인다.
오래, 진지하게 발레를 하게 된 이유를 들라고 하면 단연코 발레 선생님을 꼽는다.
어려서 뛰어다니길 좋아했다고 하고 예쁘고 재미있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걸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매력적인 외형인의 전형인 듯하다.
하지만 내향성을 공부한 후 관찰하니 아주 내향적인 인물이다. 수줍음이 많아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오래된 회원들과 희희낙낙 놀러다니기도 삼가고,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즐긴다. 직원 관리, 회원 관리, 학원 운영, 응대, 발레 가르치는 일까지 도대체 어떻게 한 사람이 저렇게까지 다 할까 싶을 정도로 꼼꼼하기 이를 데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할 이야기는 다 하는 꼿꼿함도 있다.
내향적인 사람이 사람들과의 어색함을 메우는 가장 큰 무기는 발레에 대한 집중.
회원들의 ‘발레 실력을 높인다’ 목표로 나이, 경력, 상황, 성격, 그 무엇도 감안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한다. 뒤뚱거리고, 펑퍼짐한 몸에, 발레인지 정체를 알 수 없고, "끝나고 커피 한 잔?"을 외치던 외인구단 아줌마들을 진지한 성인 취미 발레인으로 변모시킨 건 선생님의 진지함 때문이다. 그 진지함 앞에 우리도 진지해 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열과 성을 다해 발레를 한다.
입시생도 아니고, 발레단 들어갈 사람도 아니고, 발레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 그저 즐겁게 몸만 흔들다 가면 어때. 실제로 대부분의 발레 학원 분위기가 이런 것 같다. 에어로빅인지 발레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춤을 순서만 쭈주룩 내주면 우리들끼리 흥에 겨워 추면 그만이다.
발레에만 집중하는 태도로 몸이 굳을 대로 굳은 중년의 아줌마들이 눈물 콧물 다 쏟아도 '세상에 안되는 게 없어요', '누구든 할 수 있어요'라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면 펑퍼짐한 아줌마들마저 실력이 눈에 띄게 늘고, 체형이 변해간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 신화가 동네 발레 학원에서 실현되고 있다. 예중갈 것도 아니고, 발레단 갈 것도 아니지만 10 년쯤 지나면 단지 발레같기만 한 게 아니라, 예쁜 발레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거북목이 일자 되고, 말린 어깨가 쫙 펴진 아줌마가 되는 일이 불가능은 아닐 것 같다.
내향성의 대표적인 기질인 치밀함, 꼼꼼함, 배려, 완벽주의로 인해 겉으로 보기에는 말할 수 없이 느리고 답답하게 보일 수 있다. 선생님의 엄마도 느린 딸이 걱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선생님의 내향성으로 인해 중년 아줌마들의 발레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본질에 집중하니 관계적인 활동없이도 관계가 깊어진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이제는 동의할 수 없다. 시간은 걸릴지 모르지만 오히려 더 깊고 진한 관계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선생님의 늦된 모습에서 나와 딸의 모습을 본다.
뭐 하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넘어가기 어려웠던 성격.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불편했고,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를 못해 혼자 뒤처지기 일쑤였다.
돌이켜 보니 큰 장점이지만 나는 이런 면을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자라왔다. 벅차지 않은 척했고, 그 기만의 이면에는 내가 모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신에게 맞는 환경만 골라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최소한 ‘나의 모습은 느리되 숙고하는 사람이고,
빠르고 매력적인 저 사람과는 다른 강점이 있다’는 걸
자랑스럽게 인지했더라면 내 삶이 어땠을까.
치열한 경쟁 상황, 빠르게 트렌드와 기술을 습득해야 했던 업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성격이 부끄러웠다. 지금 나에게 맞지 않는 라이프 스타일을 강요한다면 쿨하게 'NO' 할 정도로 강해졌으나 열등감에 쌓였던 과거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향성을 버리고 극복해야할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꼼꼼하고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
개개인의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니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선생님의 꼼꼼함을 볼 때마다 감동과 벅참을 느끼는 한편, 하나 하나 곱씹고 가야 하는 늦되고 예민한 내향인이 일반 학교보다도 더 치열했을 예중, 예고에서 얼마나 어려웠을지가 다가온다. 뛰어난 실력에 화려한 외모를 한 수많은 발레 선생님들이 본인의 실력을 뽐내거나, 그것도 못하냐고 호통치는 학원들이 난무한 가운데 동작 하나 넘어가지 않는 그 꼼꼼함이 먼 훗날 선생님으로서(그 어떤 분야에서라도 적용될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최고의 자질이 될 것이라는 자아 존중감을 가졌다면 어린 시절의 자기 인식이 달라졌을까.
선생님이 올리는 발레 동영상이 인스타그램에서 꽤 이야깃거리가 된다고 한다.
체력이나 외모가 화려한 20대로 구성된 학원도 아니고, 30~60 대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어린 시절 발레의 발자도 모르던 순수한 취미 아줌마 발레인들이 매달 발전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도 전해지나보다. 삼삼오오 패거리를 만들며 텃세를 부리는 사람도 없고, 술자리, 커피 타임도 없고, 볼거리를 주는 전공생이나 프로 발레인도 없는 평범한 학원에서 그저 하루 하루 선생님의 잔소리에 반응하며 발레에만 집중한 나날의 쾌거라고 생각한다.
본질에 집중하는 진지함과 집중력은 남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음을 선생님과 우리를 보며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본질과 실속은 응집하는 힘이 강하다.
내향성은 극복해야 할 것, 숨길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키워야 할 자질이다.
천성이 순하고 천사같은 딸은 고맙게도 엄마가 오락가락하는 방황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내면 세계를 깊이 있게 가다듬어 가고 있다. 외로움을 달래줄 자신의 세상을 창조해냈고, 조용하지만 할 말을 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랐다.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어선지, 아니면 '때'가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감이 커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사춘기 초입인 6학년이 되었는데 애를 먹이기는커녕 더 가까워지고 있다.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의 대화도 나누기 시작했다. 함께 대화할 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언제 끝나냐고만 재촉해 참 애먹이더니 이제는 표현을 하고, 즐긴다.
“엄마 나는 친구들과 있으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렵게 생각해서 말하면 더 할 말이 없는데 끝도 없이 얘기하는 애들을 보면 신기해. 내가 재미없어서 친구들이 나와 놀고 싶어하지 않나봐.”
하지만 이제 내가 누구인가. 내향적이고 섬세한 아이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엄마가 아니던가. 조용한 아이들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구절을 읽어준다. 나의 확신은 이렇게 딸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내향적인 아이에 대한 책을 펼쳐든 요즘, 딸은 ‘조용’ ‘콰이어트’ ‘내향’과 같은 책 제목을 볼 때마다 읽어달라고 조른다.
자신의 말 없음, 느리지만 강한 모습을
이제는 본성으로 받아들인다.
외롭지만 주눅들지 않고 조용히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아이는 완벽하게 타고났는데 내가 인정하지 못했다. 타고난 본성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고, 그 어떤 본성도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까지 10 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나는 늦된 아이를 향한 원망, 걱정, 왜곡된 시선의 집합체 같은 엄마이다. 아이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자 비로소 믿고 기다리면 된다는 말이 진실로 다가온다. 아이를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고, 아이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마음이 평온하다.
이제는 이마에 뽀뽀를 하려는데 얼굴을 들어야 할 만큼 키가 부쩍 컸다. 사춘기가 뭔가요. 초등학교 졸업이 다가오는 딸이 나날이 예뻐 죽을 것 같다. 어릴 때 엄마만 찾던 딸의 미저리같은 사랑이 이제는 정확히 반대가 되었다.
짝사랑이 외면받기 전에 마음을 고쳐먹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이란 사람을 성숙하게 진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