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 되면 동심을 키워주기 보다 동심을 활용해 돈을 버는 상업적인 공간을 열심히 찾아갔더랬다.
어린이의 순수함을 기억하고, 꿈을 지켜준다는 의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그래도 넘쳐나는 장난감을 보태주는 기업의 어린이 마케팅에 얼마나 충실한 신하 노릇을 해왔던가.
사실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부모로서 무언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어린이날을 보냈는데 어린이날의 상업적인 의미에 동참하고 싶어하는 준청소년이 되어서야 기업의 고객이 아닌 가족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매년 어린이날마다 시댁의 일가 친족이 모임을 가진다. 정원이 예쁜 한 어른댁에 모여 하루 종일 정원에서 바비큐를 하며 논다. 비닐하우스에서 인위적으로 빛을 쬐며 크는 야채가 아니라 햇빛과 바람과 비를 충분히 머금은 야채를 뽑아 배터지게 먹는다.
정원이에게 “감사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했더니 “친가, 외가 식구가 마음에 들어서 좋다”고 한다. 혼자면 혼자대로 시간을 즐기고, 말괄량이 사촌 동생들이 있으면 사촌 동생과 놀아주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졸졸 따라 다니며 조잘 조잘 이야기를 한다. 가족이 함께 떠나는 여행을 가장 좋아한다.
가족 모임 중에서 손에 꼽도록 좋아하는 것이 이 어린이날 모임이다. 정원이랑 고모 할머니를 두고 남편과 장을 보고 오는데 할머니와 마주 앉아 할머니가 직접 제조한 카모마일 차를 마시고 있다. ‘도대체 어른들은 커피, 술, 차를 왜 마셔?’하며 달달한 밀크티조차 입에도 안대던 아이가 고난도의 카모마일 티를 음미하고 있다.
“차를 마시네? 먹을만해?”
“아니, 써.”
그러면서 한 잔 더 따라 마신다. 차를 홀짝이며 도대체 왜 어른들은 왜 쓴 차를 마시는지 생각하는 듯하다. 또래 아이보다 어른들이 훨씬 편하다고 어른들을 만나면 온갖 가정사를 다 노출하며 이야기한다. 놀이 기구나 선물이 주는 순간의 기쁨보다 자연, 가족, 세상이 주는 충만한 기쁨을 잘 이해하는 듯하다.
이 집의 티끌까지 좋다더니 아름다운 정원, 고즈넉한 밤의 분위기, 척 보기에도 남다른 수제티, 고모 할머니한테 자신의 생활을 조잘대는 맛에 취했나보다.
많은 독서 전문가들이 “학습 만화는 보게 하지 마세요”라고 했지만 완전히 포기했다.
학습 만화라도 봐라. 어릴 시절 보물섬과 소년중앙을 보러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만화책 보고도 잘 살잖아. 박찬욱 감독도 만화책 보고, 만화를 그리며 영화 감독의 자질을 다졌다고 했어.
마음을 놓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학습 만화 중에서도 참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만화책을 더 좋아한다. 어른들이 용돈을 주시면 아껴서 한 권씩 사모은다. 얼마 전 터키에 대한 만화책 한 권을 보더니 부쩍 터키에 호기심을 보인다.
“터키 디저트는 엄청 달대. 터키 아이스크림은 공기를 빼내서 엄청 쫄깃하대. 나 터키 아이스크림 먹으러 터키 가고 싶어.”
이 말이 나를 무한히 흥분하게 했다. 도무지 새로운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이, 자신이 세팅해 놓은 세상 외에는 관심도,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던 아이, 어느 날은 좌절했다, 어느 날은 자기 세계에 빠진 천재라고 위로하며 얼마나 걱정과 조바심의 시간을 보냈던가. 그러던 아이가 미지의 세계에 마음을 연 것이다.
"그래? 엄마도 터키 아이스크림 너무 궁금하다. 이태원에 터키 아이스크림과 팔던데 먹으러 가볼까?”
터키 아이스크림은 생각만큼 쫄깃하지 않았다.
“생각만큼 쫄깃하지 않네. 우리 나라 아이스크림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데? 괜히 사먹었다.”
그 때 정원이 입에서 흘러나온 말.
“그럼 다음에는 다른 가게에서 먹어보자. 여기 아이스크림은 다음에 안먹으면 되지 뭐.”
세상에나…. 선택하기 전에 실수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선택을 한 후에도 저 쪽을 할 걸 그랬다며 내내 아이가 이렇게나 쿨할 수 있는거야.
불량한 재료로 만들어 맛이 하나도 없던 터키 과자를 먹어보더니 정말 훌륭한 맛이라고 극찬을 한다.
“우리 다음에 터키 놀러갈까?”
“응”
“터키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어쩌구 저쩌구….”
“난 터키가서 아이스크림만 먹으면 돼. 아기 고양이 보고”
“아.. 그래 그래. 넌 고양이랑 놀아. 오스만 어쩌구는 엄마 아빠나 볼게.”
지독한 자기 사랑 뒤에 감추어진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얻을 것에 대한 기대보다는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던 아이,
자기 세상에만 빠져 현실의 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하던 아이,
느리고 느리고 느리고 또 느리고 답답하고 답답하고 또 답답하던 아이.
딸을 키우며 태생적으로 느리고, 답답하고, 남들보다 수십 배는 더 곱씹고 되새겨야 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됬다. 그렇지만 방향을 수정하지 않았다. 더 빠르게 하겠다고 학원을 보내거나 선행에 매달리지 않았다. 사교성과 민첩성을 키워 줄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어 바치지 않았다. 특히, 느리다고, 그래서 뭐가 되겠냐는 마음이 치솟아 올라도 내 입단속, 마음 단속을 단단히 했다.
기다리자. 자기 세상에 빠지게 두자. 변하지 않는 아이가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지 뭐. 어차피 공부도 별 효과 못거둘 거 같은데 손해볼 것 없잖아. 그럴 바에야 공부에 찌든 기억보다 추억할 어린 시절이라도 있게 하자. 그저 바랐던 건, 호기심, 열정,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을 왜곡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 바른 것을 바르다 나쁜 것을 나쁘다 말할 줄 아는 양심.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제는 마음을 비우려는데
큰 바위처럼 꿈쩍도 안하고 제 자리를 버티던 성향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기다리면 되는구나. 아무리 늦되고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아이도 되는구나. 십 년이 넘는 자신의 전생애에서 꽁알 꽁알 키워낸 자기만의 깊은 세계를 갖고서 이제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한 발짝씩 발을 내딛는다.
“엄마 나 터키 가고 싶어. 지난 번 할아버지 할머니 터키갈 때 나도 따라갈 걸 그랬네.”
세상에나… 터키가 가고 싶다고라. 정원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이런 모습이기를’ 상상했던 그 모습을 보기 시작한 6학년의 어린이날에 내가 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