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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다혜 Oct 30. 2022

어둠이 삼키지 않도록 너의 이야기를 써라

뮤지컬 아가사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모두 내가 계획한 대로였고 내가 결정한 사항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이상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계속되는 불안감이 있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책이 나왔다. 다행히 잠깐이지만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만 수출도, 웹툰 화도 진행되었다. 그러자 새로운 불안이 시작되었다. 한 권은 다들 낸다. 그래서 한 권만 내고 사라지는 사람이 훨씬 많다. 프로라면 일정한 퀄리티의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두 권, 세 권 꾸준히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게 내가 원하는 일이 맞는 걸까?




뮤지컬 아가사는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겪었던 기이한 일에 상상을 덧붙인 작품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다가 11일 뒤 남편의 내연녀의 이름으로 발견되는 일을 겪는다. 아가사는 기억 상실 증상이 있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미궁에 빠져있다. 극은 이 실종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가사


실종 사건을 조사하는 옆 집 꼬마 탐정과 경찰은 한 명, 한 명 취조해 나간다. 다정한 남편, 어릴 때부터 딸처럼 키워준 유모, 베스트셀러 작가를 키워주는 편집자.


이렇게 평화로워 보였던 아가사의 주위가 온통 살의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되는 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유모는 자신의 진짜 딸이 아가사의 남편과 사랑에 빠지자 아가사를 마음속에서 밀어냈으며, 편집자는 오로지 더 자극적인 작품을 내놓으라며 아가사를 압박하고 있었다.

남편, 유모, 편집자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가사 크리스티가 이름을 바꿔 출간했던 소설인 '봄에 나는 없었다'를 보며 짐작해볼 수 있다.


주인공인 중년 여성 조앤은 남편과 장성한 자식들 모두 훤칠하고 건강하고 행실이 바른 것에 큰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이따금 자신의 보살핌과 헌신을 가족이 당연시하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어느 날 멀리 사는 막내딸이 아프다고 해서 갔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학창 시절 퀸카였던 동창이 몰락한 모습을 하고 기차에서 마주치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안정된 삶을 꾸리는 자신의 모습에 살짝 우월감을 느낀다. 이후 폭우로 사막에 발이 묶이면서 숙소에서 홀로 꼼짝 못 하고 며칠간을 보내게 된다.

그 며칠 동안의 조앤의 격정적인 심리 변화가 책 한 권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실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가족이, 조앤의 그 안정과 자신의 체면 등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남편과 자식들 모두 스스로가 진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조앤에게는 속마음을 숨긴 채 겉으로만 연극하듯 살아가고 있었다.


조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기에 무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진실이, 사막의 숙소에 고립되어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던 것이다. 조앤은 며칠 만에 온 기차에 오르며, 돌아가면 반드시 사과하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도착 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로 돌아왔을 뿐이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계속, 살아간다.


로이

한편 아가사는 한 호텔에서 눈을 뜬다. 자신을 구해 준 로이라는 남자는 과거에 아가사와 접점이 있었다며 함께 있을 것을 제안한다. 이는 아가사와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독에 대해서도 잘 알고 누구보다 아가사의 내면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준다.


하지만 아가사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루머를 듣는다. 자신에 대해 이랬대, 저랬대 쉽게 말하고 결국은 '그 여자가 더 유명해지고 싶다면 시체로 발견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비수 같은 웃음소리.


넌 여자로서도,
작가로서도 실패야.

뮤지컬을 보면서 항상 이 부분부터 왈칵 눈물을 쏟곤 했다. 그들이 내 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어서 극은 나를 데리고 새로운 곳으로 데리고 간다.


이후 아가사는 로이라는 남자가 사실 자신이 살면서 느끼는 '살의'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살의에 잠식 당해가는 자신을 극복하고 말년에는 여왕의 훈장을 받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대 작가로 성장한다. 실제로 그녀는 실종사건 이후 남편과 이혼하고 훗날 평생의 사랑을 만나 재혼한다. 또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 등의 대작들을 연이어 남긴다.


극에서 그녀는 과거 꼬마 탐정이었던 작가 레이몬드에게 말한다. "내 이야기가 세상에 달려 나가고 세상을 껴안고 만지고 키스하는 거란다. 깜깜한 어둠이라도 깊은 미궁이라도 어둠이 삼키지 않도록 너의 이야기를 써라."




매번 극을 보고 실컷 울다가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살아가자. 나의 이 정체모를 불안을 껴안고. 미래의 내 모습이 어떻든 그것 또한 나의 선택일 거라고.


나는, 계속 쓰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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