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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다혜 Sep 14. 2022

'지금 이 순간'이 결혼식 축가로 적합한 이유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29살 겨울,

2년 연애한 동갑 남자 친구가 남편이 되었다.


큰 꿈을 꾸거나 큰 결심을 했던 건 아니었다.

나이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나이가 전혀 있지 않았다는 걸 지나고야 알았지만.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유명한 넘버인

'지금 이 순간'은 결혼식 축가로 유명하지만

줄거리를 아는 뮤덕들은 질색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결혼생활을 지속할수록

정말이지 이만큼 적당한 노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가 짧기 때문에
뮤지컬은 온갖 설정과 등장인물들을 추가했다.
덕분에 위선적 인간의 대표 주자인 주인공이
진실을 찾아 몸부림치는 혁명가가 되어 버렸다.

원작은 과학적 호기심 때문에 선악 계정(?)을
분리하는 실험을 하다 살인에 맛 들렸고,
하이드로 변하면 덩치 등 외형적인 면까지 변해서
절대 안 잡힐 거라 생각하고 신나게 죽이다가
지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잡힐 것 같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위선의 대표 캐릭터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식물인간인 아버지를 살리고 싶어
실험을 시작했으며, 하이드로 변하면
나쁜 놈들을 혼내주는 쓰레기로 나온다.
(쓰레기인 건 변함없음)


독특하게 봤던 건 지킬의 인간관이었다.

지킬은 실험의 의의를
식물인간인 아버지가 정신은 살아있지만

육체가 잠들어 있으니 깨우는 방법으로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점에 두었다.

감정을 표현할 이성적인 통로가
막혀있다는 논리였는데, 이게 갑자기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실험으로 변경된다.

이 앞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정신=감정=악
육체=이성=선
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느껴지면서,
지킬은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보고
이성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여기는
성악설 지지자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악을 분리하여 제거하는 것으로
목적을 바꾼 지킬의 실험은
당연히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보고 있자면 반대가 당연해 보이는데,
지킬은 권력자들이 위선자라 반대한다고 여긴다.

교수님의 허가를 받지 못한
집념의 외골수 대학원생 지킬의 선택은
자신의 몸에 직접 실험하는 것.

그때 부르는 노래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실험용 약을 만들며 흥얼.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나만의 꿈이
나만의 소원
이뤄질지 몰라 여기 바로 오늘

우리나라에서만 유난히 축가로 유명한데
이걸 축가로 택한 민족의 안목이 과연 대단하다.


그렇지... 결혼이란
내 안의 하이드를 깨우는 미친 짓이었다.
더 이상 평화롭던 지킬 때 생활 따윈 없다고!


같이 버는 내가 왜 다이소에서 천 원짜리 쟁반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 샀다고 싸워야 하는가?

(하지만 두 개 샀다.)

왜 아들 집에 가는데 미리 전화해야 하냐고

말씀하시는 시부모님과 싸워야 하는가?

(하지만 전화 안 하고 오셨을 때 문을 안 열었다.)


신이여 허~락~하~소~서!
라고 신에게 물어봐놓고는
대답도 안 듣고 그냥 지 맘대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 결혼과 이 실험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이후부터 골로 가는 직통열차 출발)

지금 이 순간 노래 직후 약물을 주사하고
Alive를 부르며 드디어 하이드가 튀어나온다.

하이드의 매력 포인트는 훅 들어오는 샴푸 향기

하이드는 욕심과 탐욕에 가득 찬,
실험에 반대했던 교수님 기득권층을

하나 둘 죽여나간다.

앞에서는 명망 있는 성직자지만

뒤에서는 어린 여자들만 골라 잠자리를 하는

교주를 죽이며 Alive2를 부르는데

상당히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넘버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떠올려 보니
실험을 반대하는 건 결과를 보니 잘한 짓 같고,
교주가 소아성애자인 건 분명 잘못이지만
극 중 예시로 나오는 어린 여자는
몸을 팔아 돈을 벌려고 나온 직업여성이므로
그 시대에는 허용되는 나이인 것인가?
그럼 소아성애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어

뭔가 애매하게 보였다.

원작에 없던 내용 중에 제일 애매한 것은
여자 주인공 둘의 캐릭터이다.
전형적인 성녀와 녀를 표현했기 때문에
남자의 시각으로 만든 옛날 극 느낌이 물씬 난다.

지킬에겐 지킬이 이상한 짓을 하고 다녀도,
주변의 평판이 안 좋아도 무작정 믿어주는
지고지순한 약혼녀 엠마가 있다.

그리고 술집에서 우연히 본 직업녀 루시가 나온다.
지킬이 매너 있게 대하니 호감을 갖는 루시.
지킬은 친절하게 대해 주고는 명함을 주고 가는데
이게 솔직히 흘리고 다니는 거랑 뭐가 다른지.

실험이 진행되면서 지킬은 외부 접촉을 거부할 때도
약혼녀 루시도 만나지 않지만
명함을 들고 온 루시는 들어오게 한다.
(그 장면 보면서 속으로 욕함... 야 이 자식아...)


알고 보니 하이드는 루시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성관계를 수시로 맺고 있었는데
하이드가 어디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숨겨진 지킬의 내면이라고 보면
역시 쓰레기는 쓰레기다.

그래 놓고 상황이 악화되니 약혼녀 엠마에게
사랑을 약속하며 결혼식을 계속 진행시키는 지킬.

하이드 탓 오졌다고 생각하며 보고 있었는데
나중엔 지킬 자신도 인정하더라.
하이드를 미워하긴 힘들다고, 또 다른 나라고.

난, 하늘 향해 외치리~ 절대 포기 못하리~
나의 길을 가겠어~

지킬이 이 넘버를 하며 폼을 잡는데
이게 노래 너무 좋고 연기 너무 좋은 와중에
사실 나는 살짝 이 결혼에 스토리에 불호를 찍었다.
(그런데 진짜 마약 같은 넘버,, 귀에 착,,)

지킬은 루시에게 여길 떠나 새 출발을 하라고 했지만
하이드는 결국 루시를 죽였고 지킬은 좌절한다.
그리고 지킬 앤 하이드의 정수, 컨프롱이 나온다.

컨프롱 요약 짤

지킬과 하이드가 순간순간 번갈아 나오며
1인 2역의 갈등을 한 번에 보여주는 명장면.

결국은 엠마와의 결혼식 장에서
통제하지 못한 하이드가 튀어나오자
지킬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극은 끝난다.
신이 정한 운명에 도전하다 몰락한 모습으로.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엠마가 지킬이랑 결혼하지 않았으니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은 이렇게 썼지만 돈 15만 원의 가치를 할 만큼
볼거리, 들을 거리, 연기 등이 좋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극.

그런 면에서 지킬의 대표 넘버는

초반에 나오는 파사드라고 생각한다.


겉만 번지르한 너의 가면 속을
알고 나면 진실이란 허상
밤이 오기까지 감춰 놓은 얼굴
행여 들킬까 봐 깊이 가둬 놓지
알고 나면
보이는 건 허상


날마다 자신조차 속이고
안 그런 척 아닌 척 다 내숭이지
알 수가 없어 그 속셈
알면서도 속는 셈
속아주니 잘된 셈
놀고들 있지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보는 것뿐
내가 보는 것은 단지 허울일 뿐
알 수 없는 정말 알 수 없는
가면 속의 허상

주위를 봐 둘러봐 봐
잔뜩 차려입은 모습
잔뜩 꾸며대는 얼굴 보여
겉만 알고 속은 몰라
보이는 게 다가 아냐
인간들은 변장의 달인

이 음흉한 비밀은 뭘까
그 거짓은 사실일까
사실 인간들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자기 안에 다른 자기
누가 보면 재수 없지
흉물스러운 몰골이지 끔찍해
남몰래 숨겨 놔야만 해
들킨다면 매장이지
손쓸 틈도 전혀 없이 파묻혀

그 잘난 여자 잘난 남자
겉보기엔 손색없지
하지만 결국 모순덩어리의 위선자
위선자

그건 선악일까 뭐가 옳은 걸까
우린 알 수 없어 다시 또 가면을
그게 바로 인간의 이중성


한두 번 대여섯 번 열댓 번
쉬지 않고 골백번 또 속고 말지
속아 넘어가
좋았어 놀랄 일도 아니야 우리 모두 한통속
모두 한통속

가면 속의 허상 가면 속의 정체
벗어날 수 없는 만나야 할 악몽
정신 차려 모두 허상이지
때론 양 떼처럼 때론 늑대처럼
때론 천사처럼 때론 악마처럼

그게 인간
절대 알 수 없는
가면 속의 허상
절대 알 수 없지
가면 속의 정체
그게 너

바로 너

유난히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뮤지컬이니
한 번쯤 봐 둔다면 어디 가서 말할 게 있는 극이다.
특히 어떤 극 보다 앙상블 분들의 실력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인상적이었다.


결혼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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