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쇼 Oct 20. 2023

조선의 흑인 노예

#조선 #역사 #박정희 #임경업 #흑인 #백인 #영조 #세종 #색목인 

결혼하기 전 스물 후반쯤의 일이다. 수원에 있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컴퓨터 보조 강사를 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지에서 축산, 농업, 화훼, 양계 농사 짓는 분들이 올라 왔다. 내가 맡은 일은 컴퓨터를 처음 다루는 분들에게 사용법을 알려 드리는 일이었다. 마우스를 화면에 가져가는 분, 손으로 화면을 누르는 분, 젊은 영농후계자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연령층과 기능 습득의 차이가 다양했다.


컴퓨터 수업뿐 아니라 농축산 이론 강의가 이어졌는데 근처에 있던 서울대 농대에서 박사과정의 대학원생들이나 교수들이 왔었다. 한번은 농업 기술을 강의하러 ‘외국인’ 교수가 왔다. 로버트 드니로처럼 코가 오똑하고 눈이 좌우로 커서 윤곽이 뚜렷하고 입체적이었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삼십대 중반쯤 돼 보였다. 그분께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내게 전라도 말씨로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어머 저는 외국인인줄 알았어요’ 


했더니 그분은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한번도 외국을 나가본 적이 없는 토종 한국인이라고 했다. 한번은 친구 어머님을 만나게 됐는데 멀리 계셨던 어머님께서 자기가 외국인줄 알고 ‘어떻게 인사를 건내야 하나‘ 걱정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면 사람들이 놀란다고 했다. 그분과 친해져서 단칸방인 신혼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간 적이 있다. 그분의 얼굴을 보면 영락없이 코쟁이 외국인인데 자신의 외모 때문에 생긴 일화들을 들려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다닌 회사 사장은 ‘아랍계 미국인’이었다. 황소처럼 큰 눈에 눈썹이 열두폭 치마처럼 길고 넓어 천막 같았다. 아래턱은 살짝 나와서 헐리웃 영화배우 같았다. 그가 공항을 가면 그렇게 중동 사람들이 말을 건내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아랍계 미국인이라고 하면 영락없이 속아 넘어 갔다. 


내 친구 남편은 영화배우 ‘조쉬 하트넷’하고 형제라고 할 정도로 닮았다. 그는 눈이 깊고 진해서 안에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장인도 드라마 배우를 잠깐 했었는데 항상 외국인 역할을 할 정도로 부리부리하다. 나의 사촌 이모도 스페인계 미국인처럼 생겼다. 자신의 외모 때문에 혼혈로 오해를 받아 난감해 했는데 키도 커서 어딜가나 시선을 받고 호의적으로 대했다.

      

어렸을때 동네에서 흑인 머리 스타일의 언니가 있었다. 아이들이 '튀기'라고 놀려서 동글게 말려 붕 떠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 기억으로 ‘단일민족’을 강조하던 때가 박정희 대통령시절이다. 1962년 집권을 하면서 전국에 유적지가 만들어지고 무령왕릉이 발굴되기도 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영웅으로 묘사해 덕수궁에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집권초 단기 년도를 없애고 서기를 쓰기 시작했다. 전국민은 대한민국에 태어난 순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야 했다. 천마총과 첨성대와 불국사, 석굴암을 보고 와서 동일한 기억, 동일한 역사를 배웠다.


학교를 졸업해 국정교과서가 아닌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다 보면 ‘단일민족’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을 만난다. 


파란 눈동자의 자주색 수염 임경업 장군


1737년 영조(재위 14년)는 이조판서 조현명에게 영남에 가거들랑 달천 사당에 들러 임경업의 초상화를 보고 오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이니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영남은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와 경상남도, 경상북도를 아우르는 별칭으로 알고 있다. 달천은 울산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영조는 조현명에게 물었다.     


“이조 판서는 일전에 영남에 가면서 임경업 초상화를 보았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길     


“예, 그의 외모는 초상화로 보면 그리 특출나지는 않지만, 눈썹이 진하고 자주빛 수염에 입이 크며 눈동자가 아주 파래서 기남자(奇男子, 재주와 슬기가 남달리 뛰어난 남자)라 할 만했습니다.”     


파란눈의 자주빛 수염을 '벽안자염(碧眼紫髥)'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해리' 왕자일 것이다. 1628년 인조 6년, 사간원은 임경업의 뇌물 수수에 대한 고변을 접해 뒷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사간원이 상에게 아뢰길,     


“낙안 군수(樂安郡守) 임경업(林慶業)은 본래 왜인의 천한 신분으로 외람되게 본읍에 제수되었는데, 수단이 추하고 교활하며 오로지 윗사람 잘 섬기기만 일삼아 세시(歲時)에 선물을 보낸 것이 20가지나 됩니다. 일이 몹시 놀라우니 파직하소서.”

     

임경업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편에서 명나라 무기고를 불태우고 명나라 편에서 일하는 척 하다가 다시 청나라에 붙는 등 갈지자 행보를 해서 물의를 일으켜 훗날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는 조선으로 귀화한 '왜인'인데 지금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위대한 장군으로 '임경업'을 배우고 있다. 그당시 임경업을 애도한 시에 윤선도는 이렇게 화답했다.     


"형편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오랜 세월 두 나라의 신하가 되고 말았구려

영의정으로 김자점(金自點)이 억지로 죄를 씌웠다고 말하지만

하늘이 죽이려 의논했는지 어찌 알았겠나

청나라 장수가 죽인다고 공갈 협박했다고 하지만

명나라 무기고를 불태운 건 용서받기 어렵지 않나

본인의 마음속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지 알 수 없으나

하늘을 우러러 괜찮을지 그건 모르겠네"    


흑인당 대표 최노성


1335년 고려 충숙왕 때 일이다. 평주에 사는 신군평(申君平)은 성품이 강직하고 신의가 있어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 인사권이 있었던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청탁하고 뇌물을 주려고 했으나 받지 않았다. 그 당시 권세 있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자가 수 백 명이나 되었다. 


그 중 최완(崔琬)이라는 자는 부친상을 숨기고 과거에 응시해 큰 고을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부모상을 입은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는데 소문이 돌아 동년배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최완은 권세가들을 쫓아다니며 도움을 받아 성균관록에 뛰어난 사람으로 기록되는 백서에 올라갔으나 신군평이 이를 알고 서명을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는 자질이 부족한 최노성(崔老星)과 바탕이 좋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인준하지 않았다. 충숙왕은 화를 내며 자신의 뜻을 거역한 신군평을 파직했다. 사람들이 안팎으로 그를 애석해 했다. 


이런 충숙왕에게 아첨하고 총애를 받은 ‘양재’라는 인물은 강남(燕南) 사람인데 음흉한 모략을 꾸미고 왕의 신임을 얻어 환관들과 결탁해 정치 권력을 농락했다. 청탁하는 자들이 그의 집 대문에 문전성시를 이뤄 구름처럼 드나 들고 뇌물이 오갔다. 상인이나 잡류(雜類)들이 그에게 의탁하고 다투며 회합했다. 


이 때 부유한 상인 출신 흑인 최노성(崔老星)도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최노성은 색목(色目)의 부유한 상인으로, 흑시(党黑廝: 검은 피부의 당수)들의 당수였다. 


그도 '양재(梁載)'를 통해 귀족(君)에 책봉될 수 있었는데 후에 양재가 물의를 일으킬 것을 예측하고 벼슬아치의 임명·승진·사면 등에 관한 발령 장부에 자신의 신상을 거짓으로 ‘104세의 노인 최노성’이라고 했다. 경질을 피해 갔을까? 그런 무리들이 100여 인에 이르렀지만 왕은 알지 못했다. 


이런 기록은 ‘고려사’에 나와 있다. 옛날에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기록한 '무원록'이라는 기록에 사람을 분류하는 항목에 '색목인'이 있을 정도로 단일 민족과는 거리가 먼 다인종, 다민족 국가 아닌가. 고려때 얼마나 흑인이 많았으면 흑인당 대표가 있었을까. 조선시대에도 흑인 노예, 흑인 기록이 있다.     


조선의 흑인 노예의 역사


1335년 10월 21일 충숙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했는데 원(元)나라의 흑인 사신(黑廝)이 온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사찰에 머물고 있었다. 문무 백관들은  영빈관(迎賓館)에 모여 원나라 조서를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다가 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놀라 예를 갖춰 움직였으나 왕은 괜찮다며 문무 백관들을 돌아가게 했다. 


얼마 뒤 원나라의 흑인 사신(黑廝)이 도착하자, 임금이 행궁에서 대신의 보고를 들은 뒤 다시 사찰로 돌아갔다. 원(元)은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몽골 제국이 중국 대륙(중원)을 지배, 통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몽골 초원에서 활약하는 흑인 정치인이라니. 


1394년 7월 5일 태조 재위 3년 되던 해, 햇살이 치밀어 덥고 건조한 섬라국 사절 장사도(張思道)를 맞았다. 그는 키가 크고 피부에 윤기가 흐르며 짙은 밤색을 띠었다. 그가 다도해에 이르렀을 때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선물로 갖고 온 예물과 행장이 모두 탔다고 했다. 행장은 오늘날 '비자'가 생긴 시초이다. 조선에 오겠다는 나라에게 방문 계획을 받고 통행증과 입국허가증을 내주면 그것으로 국경을 통과해 기한내에 출국을 해야 했다. 그가 일본에서 배 한 척을 꾸어 왔다며 예조의 대신에게 아뢰길,     


"작년 12월에 귀국에서 저희 나라 회례사(回禮使)로 온 '배후(裵厚)' 대신과 귀국으로 오던중 다도해에 이르렀을 때, 해적에게 약탈 당해 예물과 행장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배 한 척을 꾸어 주시면 금년 겨울을 기다렸다가 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영화에서 여권 위조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당시에도 '행장'을 위조해 입국하는 부정한 무리들이 있어 조정에서 새로운 서체를 개발한다. 압자체라고 해서 위조하기 힘든 글씨체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장사도'는 조공 물품으로 '칼과 갑옷과 구리 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바쳤다. 왕이 정사를 보고 있었는데, 이 보고를 받은 뒤 예조에 명령하여 섬라국 사람을 신분과 등급의 품계에 따라 대접하도록 했다. 이런 기록은 태조실록에 나와 있다.     


세종대왕의 근무태판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 1437년 6월 1일 세종 재위 19년 되던 해 기록이다. 사헌부에서 수령들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법에도 없는 세금을 걷고 백성들이 눈썹 필 날이 없는데 눈에 색깔 있는 수령들(색목인)이 고슴도치 털처럼 많아져 문제가 많다고 상소를 한다. 


그들은 아전이 하라는 대로만 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파티만 일삼았다. 이 때문에 부역이 공평하지 못하고 형벌을 주는데 억울한 사람이 속출해 소장을 갖고 오는 자를 매질하고 쫒아냈다. 더욱 심한 수령은 고을의 창고를 자기의 창고처럼 보고 공공연하게 집으로 가져 갔다. 백성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고소를 하면 오히려 곤장을 쳐서 가두고 ‘나를 고소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냐’ 하며 수령의 권한을 휘둘렀다. 


그런데 세종은 집권 26년 되던 1444년에 그들에게 특혜를 주라고 한다. 함길도는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색목인들이 용감하게 싸워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 왕업을 일으켰으니 그 사람들에게 벼슬을 줄 때 품계를 뛰어 넘어 낙하산 인사를 하라고 명하자 대신들이

    

"성상의 분부하심이 진실로 타당합니다.“     


왕도 그렇지만 주변 신하들이 그들과 한통속이 아닌가.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데 눈과 얼굴빛이 있는 색목인들의 공이 컸고 그들을 우대했다. 조선의 공신들은 파란눈, 자주빛 수염, 검은색, 흰색, 다종다양한 인종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740년 영조 때는 집안 대대로 통역관을 지낸 '이언진'이 짧막한 시 한편을 남겼다.     


얼굴빛이 검은 사람은 흑인 종놈이라 하고

성품이 어리석은 사람은 백인 바보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렇게 부를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공자처럼 현명해지는 것이다.     


그당시 흑인과 백인을 어떻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인종차별적 발언이 300년전으로 거슬러 조선에도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통역관들은 8가지 언어를 배웠어야 하는데 이언진 입장에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을 상대했기 때문에 흑인, 백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혐오하고 얕잡아 보는게 거슬렀을테다. 그가 어진 마음을 닦는데 중점을 두겠다는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내 주변에 외국계 혼혈이나 역사속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서 박정희 대통령때 ‘단일민족’을 강조하고 ‘한우’니 ‘우리것만 좋다'는 이면의 배타성과 그것을 악용하는 상술을 생각하게 된다. 울산에 파란눈과 자주빛 수염의 임경업 장군 초상화가 있는 사당이 없어서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행실에 문제가 많은 교활한 군수를 초등학교 교과서에 오래 두지 않았으면 싶다.


미국의 언어 분포도


지금까지 울산 지형이 버지니아주와 오버랩 되던중 인스타에서 발견한 버지니아 방위군의 태극 마크와, 복숭아와 연관된 미국의 리씨 마을들의 위치가 미국에서 2012년도에 조사한 집에서 쓰는 언어 분포도와 일치에 퍼즐을 맞춘 기분이다. 우리가 LA 한인타운만 생각했지 미 동북부 쪽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이 저렇게 많은가 싶다.   


연두색 부분은 '버지니아주'와 복숭아주인 '조지아주'인데 영어와 스페인어를 제외하면 한국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미국이 해외에서 이주해온 이민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그곳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의 언어 분포도라고 상상하면 우리말에 영어가 있고 미국사에 우리 것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학자가 서세의 역사관에 빚대어 '미국이 왜 신대륙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봄직 하다.


  

이전 08화 우리나라 맨홀 뚜껑 문양을 쓰는 미 연방정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