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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쇼 Dec 08. 2024

당근 싫어하는 말

#제주여행 #승마체험 #대한항공 #드르쿰다 #계엄령

"어머 저 말은 당근을 싫어하나 봐요"


500원짜리 동전 크기로 썰은 당근을 꼬치에 끼워 말에게 팔을 뻗었다. 윤기가 흐르는 밤색 털을 지닌 종마가 내게로 다가오다가 갑자기 고개를 오른쪽으로 제끼더니 등을 돌렸다. 마방에 있던 기수분이


"서열이 높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한달전 남편이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올해 안에 써야 한다며 2박3일 제주도 여행을 계획 했다. 전직 프로그래머답게 첫날 출발 시간부터 도착 시간까지 위치와 이동 경로, 소요 시간을 짠 타임 라인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문제는 40kg에 가까운 포도당을 가져가야 했다. 십여년째 신장 투석을 하느라 쇠약해진 남편은 트렁크에 짐을 실지 못하고 난감해 했다. 내가 번쩍 들어 올렸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새벽 어둠속을 뚫고 투석액과 함께 행주대교를 건너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요즘은 키오스크로 예매 내역을 확인하는데 전자티켓 번호로 검색을 해도 고객 정보가 없다고 나왔다. 큐알코드로 스캔해도 없다고 나왔다. 예매 번호로 검색해도 없다고 나왔다. 두번, 세번을 해도 같은 결과값이어서 카운터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갔다. 그녀는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내일'이 출발이라고 했다.


몸도 쇠약해졌지만 총기를 잃은 남편은 화요일로 착각하고 렌터카를 예약했다. 옆에서 확인을 안한 나도 문제였다. 그럼 숙박은 언제부터 했지? 확인해 보니 수요일로 했다. 공항에 온 김에티켓을 변경하려 했더니 편도만 11만원이 넘었다. 렌터카를 다음날로 옮기는 전화를 하고 공항내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추운 새벽 야단을 떨어 집에 와서 그대로 뻗었다. 그날밤 대통령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다음날 공항은 한산했다. 전날밤 여의도로 집결한 시민들, 군대에 보낸 엄마들은 공포속에 하루를 보냈다. 우리는 나랏일과 상관없는 외국인 관광객처럼 제주로 향했다. 신혼여행 때도 못해본 김녕 요트 타기와 돌고래 보기, 승마 체험을 일정대로 수행했다. 얘가 어렸을때 이런것을 해줬어야 했는데 아쉬워 했더니 맨날 생태체험이나 보냈다며 남편이 핀잔을 줬다. 


승마체험은 A코스 45,000원, B코스 38,000원, C코스 18,000원이었다. 비용을 보니 부담이 돼서 가장 싼 것을 하려고 했더니 체험 한 것 같지 않다는 직원의 말에 B코스를 했다. 모자와 조끼를 착용하고 순서를 기다렸다. 40대쯤 되보이는 기수가 콧대에 흰 털 무늬가 있고 노쇠해 보이는 말 한마리르 끌고 나왔다. 허리 펴고 어깨에 힘을 빼라고 했다. 기수분은 젊은 말에 올라타 내가 탄 말의 고삐를 팔에 끼워 앞장섰다. 


체험길 양 옆으로 건조해진 갈대가 바람에 흩날렸다. 햇살은 차갑고 포근했다. 내 몸무게가 적지 않아 말이 힘겨워 보였다. 기수가 잡아 당기는 고삐에 길게 목을 빼고 헉헉거리며 갔다. 이게 못할 짓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자기 역할을 하느라 목장이 돌아가고 자기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나보다 낫다 싶었다. 생전처음 말 위에 올라 긴장되면서도 애써 즐기보려고 어깨에 힘을 뺐다. 다시 또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체험이 끝나고 말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당근을 사서 마방으로 갔다. 기수분께 내가 탄 말이 어느것인지 물었다. 내쪽으로 데려왔는데 말이 화색이 돌며 당근을 받아 아삭거리며 씹어댔다. 사람 이처럼 앞니가 가지런했다. 이와 이 사이는 까만 치석이 끼었다. 가죽은 탄력을 잃었다. 사람처럼 말도 치아가 늙는구나 싶다.  옆에 있던 말들이 침을 흘리며 쳐다봤다. 기수분이 타셨던 말에게도 주고 싶다고 했더니 내쪽으로 데려왔는데 줄행랑치듯 도망갔다. 


나이가 들고 쇠약해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어린애처럼 카트를 타고 온 남편에게 있었던 일을 들려 줬더니 '사람보다 낫네' 했다. 우리집 하나뿐인 외동 아들은 집에서 서열이 높다. 아무래도 혼자다 보니 소꼽친구가 돼주고 형제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 부모가 됐다.


내 나이가 젊은 사람과 노인들 중간 세대다. 그리고 어딜가나 서비스는 하는 쪽은 상대적으로 젊었다. 나도 모르게 두뇌 회전이 느려지고 메뉴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상품명은 왜 그렇게 어렵고 길게 만들었는지. 기다리게 한 것 같으면 긴장했다. 결제를 마쳐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도 젊어 봤으니 얼마나 답답할지 아는 바이다. 


어느날인가 백화점 카페에서 주문을 하려고 섰는데 씩씩하게 응대하고 기다려준 아르바이트생이 고마웠다. 내가 저쪽에서 서비스를 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렌터카 반납하듯 모든 것을 사회에 돌려 놓고 가야 할 시기다. 반려견이 카페 의자에 앉는 사회가 됐는데 나이든 사람들이 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시대가 됐다. 오십대에 접어들어 이런 생각이 잦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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