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네 Oct 25. 2021

우물 안 개구리

 늦잠을 자버린 탓에 아침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 그래도 햇볕은 좀 쬐어야지 싶어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근처 카페에 가보기로 한다. 선선한 바람이 덜 마른 머리칼을 스쳐 코끝에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나는 것이, 이제 진짜 가을이구나, 괜히 기분이 좋아져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다. 그러고 보니 예약해둔 책을 찾아가라고 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던 게 생각이 난다. 기왕 나온 김에 가져가자 싶어 들러본다. 예상치 못하게 할 일 하나를 해치웠다는 생각에 신이 난다. 달짝지근한 커피만 있으면 완벽한 오전이 될 것만 같다.


 어중간한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더니 대기하는 줄이 꽤 길다. 바쁠 것 없는 백수라지만 그래도 왠지 기다리기 싫어 핸드폰을 꺼내 사이렌 오더로 주문을 한다. 덜 달게, 디카페인으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기계 소리 때문에 손님들의 말을 종종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게 생각이 난다. 요즘은 직원을 마주하지 않고도 내 입맛대로 주문할 수 있다니. 청각장애인들도 이 앱 덕분에 편하게 음료를 주문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좋은 변화다. 주문했던 커피를 받으러 갔더니 종이로 만든 빨대를 준다. 종이 빨대는 금방 눅눅해져서 싫다. 그래도 환경을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는 것이니 좀 불편해도 참기로 한다. 환경 운동에 동참하는 것 같아 아주 조금 뿌듯하다. 다음에는 텀블러를 챙겨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문을 나서는데 아이들이 나를 밀치고 카페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아직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 나 같은 어른이 이해해 줘야지. 짐짓 어른인 척하며, 어른스러운 미소를 미안해하는 아이의 부모님께 지어 보인다. 요즘 노키즈존 카페가 늘어나고 있다던데. 아르바이트생이나 사장으로서는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관리가 힘들겠지, 시끄러울 수도 있고, 무언가를 엎을 수도 있고. 청각장애인, 환경, 어린이와 카페 직원들의 안부까지 두루 챙기고 나니 ‘개념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된 것만 같아 어깨가 으쓱하다.        




 프린트해야 할 것도 있고, 책도 반납해야 한다. 정말 오랜만에 읽은 인상 깊었던 책이었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으니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볼 생각이다. 책을 반납하고 다른 책을 빌려 갈까 하다가 관둔다. 이번에 읽은 책보다 더 좋은 책을 찾기가 당분간은 힘들 것 같아 그저 이 여운을 좀 더 가지고 있고 싶었다. 날씨가 다시 더워졌다. 시원한 커피가 당겨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르기로 한다.


 습관처럼 사이렌 오더를 사용하려다 사람이 없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커피를 주문한다. ‘세상 좋아졌다’라며 내가 찬양했던 그 기술은 청각장애인들의 사회적 접촉을 앗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단다. 발전된 기술이 오히려 노인과 장애인들을 가상 공간에만 머물도록 격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진정한 기술은 그들이 다른 존재들과 잘 연결되도록 돕는 것이라는 말이 머리에 맴돈다. 음료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모금 들이마시는데 종이 빨대의 눅눅한 맛이 난다.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는 환경에 도움이 된다. 수십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플라스틱은 결국 지구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주름 빨대 없이는 음료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애초에 주름 빨대는 그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 기술이 보편화되어 비장애인들도 편리함을 누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들이 환경을 걱정하며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줄이자고, 필요한 사람들은 친환경 빨대를 가지고 다니자고 한다. 환경 운동과 장애인 인권은 대립하고, 그중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분명한 건 장애인 인권에 대한 고려가 환경 운동에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카페를 나서면서는 전에 부딪혔던 아이들 생각을 한다. 노키즈존이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 것이던가.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그 모든 양육의 책임은 부모 개인에게로 돌린다.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마땅히 ‘한 명’으로 대접받아야 함에도 어린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는 것은 엄연한 차별이다.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는 어린이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출생률이 곤두박질치는 건 당연하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나는 얼마나 단순한 세상을 살아왔던 것일까. 정상화의 범주 속에서, 상대적으로 편안히 살아온 내 인생을 기준으로 내뱉은 편견 섞인 말들이 얼마나 많은 타인에게 상처를 줬을까. 나의 편안함과 편리함을 위해 또 어떤 존재가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예약해뒀다던 그 책을 통해 나와는 다른 인생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삶을 잠깐 엿보았을 뿐인데 나의 안락하고 포근했던 집이 좁디좁은 우물이 되어버렸다. 우물 안 개구리, 내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그것이 나였다. 경청하고 배려하고 이따금 실천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우물만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누군가 내 우물을 더럽히진 않을까 날을 세우고 지켜보면서도, 그 옆의 우물에서는 내가 내어버린 온갖 것들에 신음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이제는 내 우물이 세상 전부가 아니라는 것, 또 다른 우물이, 심지어 무궁무진하게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의 벽들을 모두 깨어 부숴버리고 하나의 큰 웅덩이가 되어 같이 살자는 건 욕심이고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 분명 모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고, 다른 인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의 편리함이 다른 존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는 것. 내 세상과 그들의 세상이 함께 행복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내 우물과 그들의 우물이 결국 한줄기의 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물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듯 보이지만 결국 순환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것 말이다. 책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책을 읽는 행위는 세상을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일이어서 다른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해주고 그들을 위해 고민하게 해준다. 다른 우물로 통하는 물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읽으려고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물길을 트다 보면 작은 웅덩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웅덩이의 크기를 키워나가다 보면 하나의 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모두가 각자 다른 존재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사이에 있는 수많은 벽을 하나씩 무너뜨려 세상을 감싸는 바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벽을 무너뜨리려는 그 순간이 되었을 때, 용감히 망치를 휘두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 이 순간, 나는 내 작은 책장을 들여다본다.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빌려오지 않은 게 못내 아쉽다. 오늘도 나는 다른 우물을 엿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