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하는 회춘

#한국어 수업 9강

by 로하

“콜롬비아에 있는 곳을 소개하는 문장을 써보세요.”


어느 정도 소개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숙제를 내주었다. 소개할 장소의 사진과 배운 문법 안에서 콜롬비아에서 소개하고 싶은 장소를 PPT로 간단하게 서너 곳 정리하는 숙제였다. 그래 봐야 ‘있다’ ‘이다’ 동사로 가능한 간단한 문장들을 쓰는 것이었다.


“배운 문법 안에서 최대한 단순하게 문장을 쓰는 거예요 할 말은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내내 질문 톡이 쏟아졌다.


“.... 는 어떻게 써요? ...는 한국어로 뭐예요?”


그 마음을 안다. 그냥 장소 이름 쓰고, 장소가 있는 위치 쓰고, 형용사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내가 가진 지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마음. 써놓고 보니 너무 유치해서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는 마음 말이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그 언어로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 마음은 급해진다. 스페인에 도착해 몇 개월 학원에 다닐 때 이미 한국에서 꽤 스페인어를 하고 갔지만 처음부터 수업 시간에 스페인어가 유창하고 말 많은 유럽 친구들과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정 주제가 나왔을 때 머릿속에는 한국어로 논문도 쓸 판이지만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너무 빈약해 차마 입을 못 떼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시아 권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말을 잘 안 하고 조용하다는 고정관념이 있기에 그런 나의 말없음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도 싫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업에 익숙해졌을 때 나는 수다쟁이가 되기로 했다. 틀리건 말건 유치하건 말건 일단 말을 하고 보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빨리 말문이 트이는 것을 도와주었다.


“로하는 아시아 학생들 같지 않게 말이 많네”


한국에서 수다스럽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었는데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나는 스페인 살이 이후 말이 좀 많은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외국어로 하는 나의 말의 수준이라는 것은 한국어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 물론 다른 언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일상으로 배워서 하는 외국어 문장은 다소 유치하고 어눌하며 뭔가 잘못 번역해놓은 문장처럼 균형이 안 맞기 일쑤이다. 문장이 복잡해질수록 그렇다. 그러니 스스로 내가 구사하는 외국어가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인들이 외국어를 쉽게 배우지 못하고, 특히 말을 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나의 언어 수준을 낮추는 것에 관대하지 못함이다.


“지금 내 나이와 상관없이 언어 나이는 어린아이에 맞추어 말하세요”


스페인어를 가르칠 때도 한국어를 가르칠 때도 내가 하는 말이다. 모국어로 떠오르는 머릿속 문장을 그대로 옮기려 하지 말 것, 나의 언어 수준을 이제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로 낮출 것. 그래야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

스페인에 살 때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동양 사람의 나이를 친구들이 잘 가늠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나의 언어 수준도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보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언어로 하는 회춘인 것을.

그렇게 어린아이에서 조금씩 성인이 되는 언어의 나이를 새로 먹어야 하는 일이 외국어를 배우는 일인 것이다.


친구들이 소개한 콜롬비아에는 멋진 곳이 많았다.

얼마나 장황하게 그럴싸하게 설명하고 싶었을까.

그 아쉬움을 모아 모아 더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일단 언어 회춘을 했으니 이제는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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