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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삼열 Oct 09. 2023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1

역설, 그 다정한 무관심에 대하여

  얼마 전, 국어 수업 시간에 수행평가를 했다. 무려 20점짜리 수행평가였으므로, 학생들도 열심히 준비했고 나도 집중해서 평가했다.      


  이렇게 참여자 모두가 긴장한 건, 이번 평가는 수행 현장에서 평가가 바로 이루어지는 ‘듣기·말하기’ 평가였기 때문이다. ‘읽기’나 ‘쓰기’ 수행평가는 결과물을 일단 보관해 놓았다가 추후에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지만(답안지를 보며), 이번과 같은 ‘듣기·말하기’ 평가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교실에서 바로 점수를 산출해 내어야 하기 때문에(답안지 없이) 특히 부담스럽다.     


  수행평가 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과제: 자유롭게 소설 두 편을 선정하여 독서한 후, 해당 도서의 주된 표현 방법 중 하나를 골라(풍자, 역설, 반어 중 택일), 두 소설을 비교·대조하는 발표를 수행할 것

 조건: 발표는 3분 내외로 하되, 발표에 필요한 발제문 및 PPT를 사전에 제출할 것     


  발표 수업은 일주일 이상 이어졌다. 학생 한 명당 3분씩 발표할 수 있고, 청중과 질의응답까지 나누어야 하니, 실제로는 한 명이 최소 5분을 발표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발제문을 청중에게 나누어 주고 피피티를 준비하는 시간까지 더해지므로, 사실상 발표 하나 당 7분 정도가 걸렸던 듯하다. 참고로 한 반의 인원이 서른 명쯤 되고, 45분 수업에서 여섯 명 정도가 발표했다.     


  120개가 넘는 발표 하나하나가 모두 인상적이고 개성 있었지만, 특별히 나의 주목을 끈 발표 하나를 소개해볼까 한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과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를 독서한 후, ‘역설법’에 주목하여 두 작품을 비교·대조한 발표였다.     


  



  소설 아몬드: 선천적으로 작은 편도체를 가지고 태어난 탓에 '감정표현불능증’이 있는 16세 소년 윤재가 성장해 나아가는 소설이다. 윤재는 여러 사건·사고를 겪으며 점차 우정 및 사랑과 같은 감정에 눈뜨게 된다. 윤재의 할머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를 ‘예쁜 괴물’이라고 부르며 아낀다.      


  소설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중편소설로서,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로 손꼽힌다. 주인공인 ‘나’는 어머니의 장례 이후, 일상에 대한 지루함과 환멸을 느끼던 중,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나’는 재판 과정에서 그리고 수감 과정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갖가지 회유 및 권유, 비판 등을 듣게 된다. 이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고요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다정한 무관심’ 혹은 ‘애정 어린 무관심’을 느끼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다. 이 소설은 인간성을 상실한 채 일상을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을 비판한 소설로서 종교, 사법, 윤리 등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의 실존을 되찾아야 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학생은 소설 ‘아몬드’에서 ‘예쁜 괴물’이란 표현에, 소설 ‘이방인’에서 ‘다정한 무관심’이란 표현에 주목했다.     


  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컨대 우리 사회는 장애인, 노인, 청소년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가진 아름다움 및 이들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비장애인, 젊은이, 성인과 같은 주류 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물며 괴물도 예쁠 수 있다는 것을, 때로는 교화보다 다정한 무관심이 가치롭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나는 이 발표를 들으며 그야말로 숱하고 숱했던 ‘과잉 관심’들을 떠올렸다. 

  장애인을 신기한 동물 보듯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길거리에서, 식당에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너무도 흔하게 마주친다. 그 옛날 흑인을 쳐다보던 백인처럼, 동양인을 바라보는 서양인처럼, 그리고 2021년 초에 마스크를 쓴 사람을 위험한 존재로 경계하던 보통의 시민들처럼... 그러한 시선에는 온기가 없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오직 상대를 타자화하여 관찰할 뿐이다.   

   

  다문화가 산소처럼 퍼져 있는 유럽과 같은 사회에서 이제는 누구도 동양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평등한 시선은 장애인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식당에 들어가도, 흰지팡이를 탁탁 두드리며 길을 걸어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특별한 일이 아니므로 무관심한 것이다. 그러다가도 장애인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면, 누구나 돕기 위해 손을 내민다(제삼열의 졸고 ‘낯선 여행, 떠날 자유’ 참고).      


  비단 장애인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임산부, 노인, 유색 인종... 우리가 속할 수 있는 모든 부류에 대해 우리는 무관심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지니지 않을까.    

  누군가 특이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신기하게 쳐다보지 않는 ‘고마운 무관심’,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여지없이 손을 내미는 ‘준비된 관심’. 나는 유럽에서 미래의 우리 모습을, 성숙한 시민의식을 경험했다. 그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질의응답 시간에 내가 학생에게 물었다.

  “청소년으로서 폭력적인 시선을 마주한 경험을 소개해 주세요. 그리고 ** 학생이 누군가를 향해 다정한 무관심을 보인 경험도 소개해 주세요.”    

  나는 이번 발표를 통해 ‘다정한 무관심’이 서른 명의 마음속에 각인되길 바랐다. ‘타자화된 관심’은 ‘무형의 폭력’과 일맥상통함을 내면화하길 바랐다.   

  이런 수준 높은 발표를 하는 아이들이 어서 자라서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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