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치 Feb 06. 2024

IN UTERO : 결핍의 편린

by Nirvana (1993)

결핍의 편린


 사춘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밴드는 단연 너바나였어. 또 내 음악적 영웅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커트 코베인을 첫 손가락에 외쳤지. 나의 사춘기는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걸쳐 있었고, 커트 코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1994년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었어. 그 때문에 내가 커트 코베인을 더 친근하고 안타깝게 여겼는지도 몰라.

 그 시절 나는 청바지에 후줄근한 티셔츠, 카디건을 걸치고 컨버스 원스타를 구겨 신곤 했어. 커트 코베인과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서 말이야. 내 친구들은 커트 코베인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지. 처음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하게 된 계기도 너바나의 《MTV Unplugged in New York》 음반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어. 무수한 촛불 속에서 읊조리는 그의 영상을 틀어놓고 나는 이 코드는 이리 짚고 저 코드는 저리 짚으며 악기를 뚱땅거렸지.


 한 밴드의 디스코그래피 수집을 완성한 것도 너바나가 처음이었어. 가장 유명했고 가장 처음 들었던 《Nevermind》를 필두로 해서, 초창기의 영세함이 묻어나는 (하지만 제일 환하게 빛나는) 《Bleach》, 《Incesticed》를 사 모았단다. 영상으로 자주 접했던 《MTV Unplugged in New York》,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까지 사고 나자, 당시 기준으로 내게 남은 것은 그들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IN UTERO》 하나 뿐이었어. 밴드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 내 너바나 콜렉션의 마지막 조각이었지. 그런데 내가 그 조각을 채우기까지는 또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어.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로 학생 신분의 나는 돈이 없었고, 둘째로 내가 어찌어찌 어둠의 경로를 통해 《IN UTERO》의 mp3를 다운로드 받아버렸기 때문이야. 지금은 부끄러운 이야기가 되었지만, 인터넷의 여명기. 사춘기 소년조차 손쉽게 불법으로 mp3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던, 당시는 그런 시대였지.

 mp3로 《IN UTERO》를 마르고 닳도록 듣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음반을 구입했어. 마지막 음반이니 특별히 수입반으로. 반질반질 찐득찐득한 스티커를 조심스레 제거하고 나니 가슴이 벅차올랐어. 여느때처럼 플레이어에 음반을 넣고 자리에 앉아 앨범 속지를 읽어나갔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어. 내가 가지고 있는 mp3 파일 숫자보다 한 트랙이 적었던거야. 몇 번을 세어봐도 똑같았지. CD의 마지막 트랙은 〈All Apologies〉인데, mp3의 마지막 트랙은 〈Gallons of Rubbing Alcohol Flow Through the Strip〉라는 긴 제목의 곡이었어. 나는 백방으로 정보를 찾았고 결국 그 마지막 트랙은 미국 외 지역에서 판매 된 음반에만 특별 수록된 보너스 트랙이란 사실을 알아냈어. 마지막을 특별함으로 장식하고 싶었던 나의 노력이 결국 마이너스로 돌아왔달까. 헛 웃음이 나오고 화가 났지만 별 수 있으랴. 나는 내 mp3의 구성과는 다른 음반의 구성에 익숙해지기로 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어.


 요즘 생각으로는, 〈All Apologies〉로 앨범을 마무리 짓는 이 수입반의 트랙 구성이 썩 나쁘지 않아. 그 밝고 슬픈 노래가 끝난 뒤 서서히 감속하는 CD의 모습에서 평화를 느끼기도 해. CD가 회전을 멈추며 내는 마찰음도 좋아. 마치 한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작은 알람 같기도 하고. 내가 여태껏 CD를 즐겨 듣는 까닭은 바로 그런 사소한 현실감 때문이 아닐까? 〈Gallons of Rubbing Alcohol Flow Through the Strip〉도 역시 훌륭한 곡이지만, 그 히든 트랙에 도달하기까지 20분 넘게 돌아갈 CD의 모습을 상상하면 조금 안쓰러워.


 〈IN UTERO〉는 두말할 것 없이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껴듣는 너바나의 앨범이야. 〈Dumb〉, 〈Heart-Shaped Box〉, 〈Pennyroyal Tea〉와 앞서 언급한 〈All Apologies〉 등 명곡들이 산재해있어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앨범에서 좋아하는 요소는 음반을 관통하는 답답한, 어딘가 갇혀있는 듯 좁게 울리는 사운드야, 이 답답한 《IN UTERO》의 음색에서 유일하고 무이한 감각을 느껴져. 너바나의 최고 히트작 《Nevermind》의 화사한 사운드에서와는 전혀 다른, 산만함과 너저분함 말이야. 개어놓지 않은 빨래와 먼지구덩이 속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만 같달까. 그 답답함의 어딘가에 커트 코베인이 빠져있던 우울과 고통, 결핍의 편린이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번 앨범을 들을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받아.


 인터넷의 발달로 여러 정보를 얻기 쉬워진 나중에 알고보니, 커트 코베인은 완성된 앨범의 사운드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해. 지금도 앨범 녹음 때 온 방에 걸쳐서 꽉 차도록 마이크를 썼다더라, 룸 밖에도 마이크를 놓았다더라, 하는 야사가 난무하지. 추측컨데 본래 커트 코베인은 지금보다 훨씬 더럽고 Roomy한 공간감을 구상했을 거야. 높으신 분들의 뜻에 의해 정돈되었을 발매본에서조차 거친 색감이 결결이 삐져나오니, 커트 코베인이 최초에 의도했던 《IN UTERO》의 모습은 어떠했을런지 참으로 궁금해.

 그의 안타까운 요절로 인해 《IN UTERO》의 원래 모습은 지금 있는 CD를 들으며 추측할 뿐이지. 그러나 누가 알겠니? 가까운 미래에 누군가 커트 코베인을 관짝에서 끄집어내어 너바나의 신보를 찍어낼지도 몰라.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번에도 어느 뮤직 그룹의 '높으신 분들'일 것일테고.


커트 코베인은 《IN UTERO》 발매 후 몇 개월 뒤에 자살했다. 향년 27세의 나이였다.

생전 커트 코베인은 그림도 더러 그렸다. 《Incestiside》 앨범의 커버도 그가 그린 것인데, 인터넷을 찾아보면 그가 그린 기괴한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다.


Duration    41:23

Release Date    September 21, 1993

Recording Date    February 1993

Recording Location    Pachyderm Recording Studios, Cannon Falls, Minnesota

이전 15화 신중현과 엽전들 1집 : 한국의 로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