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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치 May 24. 2024

조선왕조 오백년 : 맺음말

by 전산실의 청개구리 (2016)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밴드 이름을 ‘전산실의 청개구리’로 새로이 했으니, 이쯤에서 정규 앨범 하나 내죠 뭐. 북극곰 사운드 대표님에게 그런 말을 건네었던 때가 2013년 가을이었다. 서른을 목전에 둔 20대 후반. 우리 밴드 이름으로 싱글도 내보고 EP도 내보고 거기다 다른 밴드들의 정규 앨범 작업도 꽤나 해보았으니, 내 나이에 ‘ㄴ’ 받침 붙기 전에 제대로 된 정규 앨범 하나 정도는 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쌓아둔 곡들도 꽤나 많았고, 만들다만 노래들도 다듬어 쓰면 정규 앨범 까짓 거 뚝딱 만들겠거니 했다. 그런데 막상 앨범을 기획하려니, ‘정규앨범을 쉽게 만든다’는 그 아이디어가 영 탐탁지 않았다. 쉬이 만들었다간 쉬이 사라지는 음악이 될 것만 같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쯤에서 고민을 그쳤어야 했으나, 결국 나는 만용을 부렸다. 만만치 않은 정규앨범을 만들기 위한 만만치 않은 길이 필요했다. 거 기왕 내는 거 콘셉트 앨범으로 가시죠! 대표님에게 선언해 버렸고, 상의를 이어간 끝에 새 앨범의 콘셉트를 ‘조선왕조 오백년’으로 잡았다.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그 강의를 바탕으로 앨범을 만든다’라는 방법론까지도 일사천리로 정했다. 이건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대박 날 수도 있겠다. 행복한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얼마 뒤, 나는 같은 과 출신 절친한 선배를 통하여 K박사님을 소개받았다. ‘조선왕조 흥망사를 2시간짜리 강의로 만들어달라’는 우리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주신 K박사님과, 한양대에 강의 자리를 만들어준 선배의 도움으로 무사히 약 3시간에 걸친 조선사 특강을 녹음할 수 있었다. 때는 2014년 4월이었다.

 강의를 녹음했으니 이제 음악을 만들 차례였다. 나와 내 동료 C군이 함께 달라붙어, K박사님의 강의로 풀어헤쳐진 500년 조선사를 음악이란 얇은 실로 한 톨 한 톨 꿰매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랑이나 우정 같은 스쳐가는 감정조차 담기 어려운 것이 음악일진대. 위화도 회군이니 임란 호란 같은 선 굵은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니, 우리의 얄팍한 내공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예컨대 그것은 초보 운전자가 F1 경주차를 타고 출퇴근길 강변북로를 질주해야 하는 일과 같았다.

 데모를 받아 들은 대표님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영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우리의 데모들은 보내는 족족 까였다. 이게 별로다 저게 별로다 하는 코멘트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별로’인 음악들만 만들고 있었다. 너무 많이 까이다 보니 나중에는 섭섭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종국에는 기존에 만들었던 곡, 스케치만 있던 곡들도 끌어다가 가사를 고치고 조선왕조 오백년에 대한 곡인 척 꾸미기도 했다. 물론 그 곡들 또한 까였다. 지난한 작업이 1년 넘게 이어졌다.


 2015년 여름 즈음이 되자, 하드 드라이브에서 썩은 내가 났다. 켜켜이 쌓인 폴더 트리가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변화의 계기가 필요하던 바로 그때, 해결의 실마리는 엉뚱한 포인트에서 풀렸다. 남은 치킨을 활용하는 방법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보던 중이었다. 식은 치킨 위로 투하되는 양념들을 보며, 저 요리에서 과연 치킨 맛이 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영상의 주인공은 너무 맛있다고, 치킨의 대변신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유레카! 남은 치킨만 넣으면 치킨 맛이 안 나더라도 치킨 요리이듯, 조선의 인상만 잘 포착한다면 태정태세문단세를 줄줄이 읊지 않더라도 조선사 콘셉트 앨범이 되겠구나! 역사 그 자체보다는 역사에서 받은 인상을 그려내 보자. 몇 백 년의 대서사가 아니라 그저 인상이라면, 그 정도라면 우리 음악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고쳐먹으니 곡 작업도 술술 풀렸다. 기존에 녹음해 둔 강의 내용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위화도에서는 비가 왔으므로 축축하게, 세종대왕 치세는 조선의 중흥기이니 밝고 활기차게, 사도세자의 죽음에선 안타까운 감정을, 그저 그렇게 인상을 중심으로 작업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인상만을 표현한 우리의 음악에서 오히려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했다. 일이 풀리자 자신감이 생겼다. 대표님은 여전히 우리의 앨범에 우려를 표했으나 나는 그대로 밀어붙이고 싶었다. 누구 한 명(나)이라도 만족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 이 길었던 음반 작업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더군다나 나는 2016년 가을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발매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발매일이 잡히고 본격적인 녹음이 시작되자 그 많던 시간이 급작스럽게 쪼그라들었다. 회사에 다니고 결혼 준비를 하는 짬짬이 충혈된 눈을 부비며 앨범 제작에 몰두했다. 그야말로 내 짧은 음악 인생 짬밥에서 짜낼 수 있는 기름이란 기름은 다 짜내어 음반에 쏟아 넣었다. 그 와중에 참 많은 선후배동료친구동생형님누님선생님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도 받았다. 이 글에서 그분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열거하기는 힘들겠지만, 정말 그들이 아니었다면 <조선왕조 오백년>을 세상에 내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고 2016년 4월 28일 전산실의 청개구리의 정규 앨범 <조선왕조 오백년>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일에 산고, 산통의 비유를 하기도 하는데, 이 작품 <조선왕조 오백년>이 내게는 딱 그런 음반이다. 다른 많은 이들은 모르고 나만 알고 이뻐하는 그런 음반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내 새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년 뒤에는 이 앨범이 발매된 지 10주년이 되고, 2018년에 태어난 내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된다. 그때가 되면 조촐한 축하파티 하나 열고 싶다. 딸도 자리에 앉혀놓고 차분히 음반을 듣고 싶다. 이제는 아무도 듣지 않고 내 책장에만 꽂혀있는 CD 한 장이 되었지만, 이 앨범 안에는 조선왕조 오백년의 치열한 역사, 내가 뜨겁게 음악을 듣고 만들어온 역사, 그런 역사로 말미암아 만날 수 있었던 따듯한 사람들과의 연주와 노래, 노력들이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부터 12월 말까지 MBC 무한도전에서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 특집이 방송되었다. 역사 강사 설민석이 역사 강의를 하고, 그 뒤 무한도전 멤버들과 뮤지션들이 음악을 만들어 콘서트를 하는 과정을 다뤘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발매가 2016년 4월인데 기획이 워낙 비슷하여 홀로 속상해했었다. 나는 지금도 두 프로젝트의 유사성이 아주 우연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프론트 커버는 조선왕조의 의궤와 정조대왕 행차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앨범 속지에는 강의를 맡아주신 K박사님이 직접 요약한 조선사 단평들이 실려있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접하기 어려워 애석한 마음이다. 10주년이 되면 다시 한번 강의를 청해보고자 한다.  




<언젠가 물려줄 나의 음반 이야기> 연재를 일단 여기서 마칩니다.

완결을 위해 10회까지는 연재가 이어져야해서(브런치 정책) 몇 주 동안은 짧은 글들로 남은 연재를 채우려 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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