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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치 May 17. 2024

What's Going On : 나는 왜? 내가 왜?

by Marvin Gaye (1971)

 이번 주 연재는 제가 대학 시절 교내 잡지에 실을 목적으로 썼던 글로 대신합니다. 어릴 때 썼던 글을 거의 수정 없이 올리는 만큼, 자의식 과잉과 오글거림에 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호 핵심어가 ‘나는 왜’라는 전언을 받았을 때부터, 나는 줄곧 ‘나는 왜’ 대신 ‘내가 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단 한 글자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이 두 표현은, 그러나 굉장히 상반되는 뉘앙스를 풍긴다.


 1인칭 대명사 ‘나’와 보조사‘는’에 ‘왜’가 결합한 ‘나는 왜’를 살펴보자. 이는 일상적으로 ‘나는 왜 이렇게 ~할까?’ 정도의 표현으로 자주 쓰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은 말하는 주체가 현재 자기 자신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혹은 비관적으로) 여기고 있음을 피력할 때 쓰인다. 즉, ‘나는 왜’라는 말은 외면을 의식하는 사고보다는 내면 지향의 사고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왜’라는 세 글자 속에 ‘자아성찰’이라는 네 글자 단어가 숨어있는 꼴이다.  


 이제 앞선 명사가 문장의 주제어임을 암시하는 보조사 ‘는’ 대신, 앞선 명사가 동사의 주체임을 나타내는 격조사 ‘가’붙여보자. ‘내가 왜’는 무언가를 회피하고자 하는 사고의 산물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초래한, 아니면 타인에 의해 강제되는 상황에 대한 회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내가 왜’식 사고가 성공하는 경우는 없다. 결국 어디까지나 ‘내가 왜’는 임시방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왜’식의 사고가 ‘나는 왜’로 바뀌지 않는 한, 그 어떤 진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왜’와 ‘내가 왜’ 문제는 인간사 전반에 걸쳐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지만, 본 칼럼의 성격 상 필자는 지금부터 음악과 관련지어 ‘나는 왜’와 ‘내가 왜’의 이야기를 더 풀어내려 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1960년대 말 미국이다.


 베트남으로부터 날아온 피냄새, 1965부터 시작된 워싱턴의 반전 행진, 이후 3년 간 확산된 시위,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당시 미국은 사랑과 평화, 아니면 증오와 폭력, 마리화나, LSD 뭐 그런 것들이 퍼지던 혼란스러운 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모타운 레코드에서 러브 송들을 부르던 톱스타 마빈 게이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친동생 프랭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왜’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던 중 1970년 켄트주립대학에서 정부진압군이 민주화 시위를 하던 학생들에게 총을 발포하여 네 명의 학생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모타운을 비롯한 흑인 음악 레이블들은 사회참여적인 내용의 음반을 발매하는 것이 상업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응당 그런 과격한 이슈를 즐기는 음악 집단이 있었고, 음악에 메시지를 담는 작업은 그런 이들의 몫으로 치부했다. 존 레논과 도어즈가 잘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하지만 마빈 게이의 물음은 그치지 않았다. 왜 서로를 미워하고 죽여야만 하는가? 죽어야 할 이유도 모른 채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 죽어 가는데, 나는 그것을 모른 채 할 수 있는가? 이 잔인한 현실을 노래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러한 고민이 없었다면 <What's going on>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왜’로 대표되는 반성과 성찰이 또 다른 선택의 여지인 ‘포기’, ‘좌절’과 연결되는 접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는 왜’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왜’로는 열리지 않는 새로운 돌파구가 ‘나는 왜’에 의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왜’식 사고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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