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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May 07. 2018

룸메 말을 잘 듣자.

미디어 카페에서 잘 걸 그랬어.

 이전 룸메와 기타큐슈를 갔다 온 적이 한 번 있습니다. 둘 다 부산에 살고 있었고,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는 진에어 특가가 떴길래 학기 중 주말을 이용해 이자카야에서 사케나 마시며 밤을 새우자는 데에 둘 다 동의한 게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필름 카메라를 들고 떠났습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키타큐슈에서 날밤을 새며 바라본 아침의 풍경들입니다.

바다가 바로 바라다 보이는 기타큐슈 공항

 김해에서 기타큐슈까지 거의 이륙과 동시에 착륙한 공항은 상쾌한 바닷바람이 맞이해 주었습니다. 자그마한 공항이지만 정돈된 느낌이 여행의 설렘을 배가시켜 줍니다. 공항에서 나가는 별도의 철도는 없지만 진에어 취항 기념 쿠폰으로 고쿠라 역까지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난 여행에서의 한 줄기 빗물이었습니다. 

고쿠라 역으로 가는 버스와 고쿠라 역의 사람들 

 처음의 고쿠라 역은 복잡한 육교가 얽히고설킨 복합터미널 느낌이었습니다. 그저 지나칠 곳으로만 인식했었는데, 어느새 가장 많이 지나다니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모지코에서 저녁을 보내다 고쿠라로 돌아올 때도 이곳, 밤새 돈키호테랑 이자카야를 나다니다 가도 결국 새벽이 되어 돌아온 곳도 이곳, 다시 공항으로 갈 때에도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우선은 고쿠라를 잠시 넣어두고 기차를 타고 모지코 레트로 지구로 이동합니다. 

 

모지코 역

 원래는 모지코 역 건물 자체도 문화재 중의 하나인데, 저희가 갔을 땐 아쉽게도 보수공사 중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그들에게 레트로-라는 게 어떤 의미인진 모르겠지만, 목조건물로 지어진 이삼층의 양옥집이 레트로 한 감성이라면 모지코 항을 둘러싼 이곳은 레트로 한 곳이 맞습니다. 유럽풍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동화스럽고 헨델과 그레텔의 과자집 같은 건물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레트로 전망대를 제외하곤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뛰논다거나, 옛 이야기꾼 아저씨가 물엿 사탕을 쥐어주며 구전을 펼쳐도 잘 어우러지는 곳입니다.

모지코 항 레트로 지구

 모지코 항은 큐슈 섬 끝자락에서 시모노세키를 마주 보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갔다 와볼까 싶었지만, 모지코 항에 노을이 지고 저희는 모지코 맥주공방이란 이름의 맥주집으로 들어갑니다. 치즈 플래터 하나에 맥주 두 잔 시켜두고 해가 지는 걸 바라보다가 편의점 맥주랑 간식거리를 사들고 밤이 된 항구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막차시간을 기다립니다.

모지코 맥주 공방

  다시 고쿠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밤을 새울 궁리를 해야 합니다. 낮에는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겨운 곳이었는데, 밤이 되어 불이 다 꺼지고 어둑한 지하도 조명만 깔린 이곳은 조금 무섭습니다. 우선 저희는 일본에 왔으니 빠질 수 없는 노선으로 돈키호테를 방문했습니다. 늦게까지 열려있는 이곳에서 한국으로 들고 돌아갈 간식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나니 새벽 2시 즈음이 되어있습니다. 

 사실 혹시나 몰라 고쿠라 역 앞에 미디어 카페가 있는 것을 봐 두긴 했습니다. 룸메가 그때 거길 가자고 했을 때 갔었어야 했는데 하필 제가 왜 고집스럽게 이자카야를 가자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사케를 마시자고 여기까지 온 건데 이자카야를 가야지, 라는 심보로 룸메를 데리고 어둑한 길을 돌고 돌아 호르몽 구이를 먹으러 들어왔습니다. 

 사실 정작 돈도 없어서 사케는커녕 하이볼만 홀짝이며 호르몽만 구웠습니다. 그래도 메뉴판에서 가장 싼 부위가 이토록 맛있어서 다행입니다. 감질나게 200엔에 두 점씩 나오던 고기를 화로 앞에서 구워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뭐하지'라는 답 없는 고민만 계속해서 하다가 현금이 다 떨어질 때쯤 사장님께 혹시 카드로 계산이 되냐고 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돌아온 대답은 いいえ(아니오)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고쿠라 역의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게를 나왔는데, 할 건 없고 갑자기 분위기는 냉랭해졌습니다. 괜히 밤새자고 말해두고 현금도 두둑이 챙겨 오지 못한 제가 미안해집니다. 진작 룸메 말을 듣고 미디어 카페를 갔다면 밤뿐 아니라 다음날 아침도 개운해졌을지 모를 텐데요. 미안한 마음에 노래방을 제안합니다. 이 멀리도 와서 술 마시고 하는 일이 노래방인 것은 학교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네요. 그리고 이 날 일본은 노래방을 사람 수 대로 가격을 매긴다는 것을 처음 알고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해가 떠오르는 어스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구글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다 발견한 공장단지 한가운데의 공원에서 아침을 맞이합니다. 물병을 들고 아침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보이는데, 룸메와 저는 말없이 벤치에 앉아 어제 왜 그랬을까 고민을 합니다. 몸은 천근만근인 상태로 마지막 종착지인 고쿠라 성을 보러 가는 발길이 무겁습니다. 가는 길에 탄가시장을 들러 시장이 문을 열고 아침 햇살에 활기를 띠는 것을 구경합니다. 새벽을 지나 완연히 아침을 맞이한 고쿠라 성 앞에서는 어떤 대회가 한창이었습니다. 육상 조끼를 입고 구령을 외치며 힘차게 달리는 사람들과 반대로 축 늘어져 성을 향해 올라가는 우리가 대비가 됩니다. 아마 여태 여행을 하며 가장 힘겹게 맞이한 아침이 아니었을까요?

아침 문을 여는 탄가시장의 골목
육상 대회로 추측되는 대회장 뒤로 고쿠라 성이 보입니다.

 그래도 싱그러운 나무가 있는 고쿠라 성 정원에서 짧은 감상을 남기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밤이 길었던 날에 비해 아침은 너무나 분주하고 빠르게 흘러가 저의 시간이 아닌 느낌이었습니다. 종종 과제를 하느라 별 사진을 찍느라 밤을 새우곤 하면 다음날의 분주함은 제 것이 아닌 느낌이죠.

 

 저희는 다시 고쿠라 역으로 돌아와 맥모닝을 먹으면서 공항으로 돌아갈 시간을 기다리다 이곳 큐슈가 돈코츠라멘의 발상지라는 얘기에 시장에서 아침 겸 점심으로 진한 육수의 돈코츠라멘을 한 그릇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은 여행에서 동행인의 의견을 꼭꼭 챙겨 듣고 괜한 고생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 지금은 그때 룸메와 자주 마주치진 않지만 그래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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