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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Aug 19. 2019

나는 결국 설국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모스크바에서 바이칼 호수, 바이칼에서 집까지.

첫 번째 열차에서

 이제는 일기장을 뒤져야 그때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그때 일기를 들여다봤더니 그림이 참 많이도 그려져 있는데, 이층 침대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한정적인 시야를 다양하게 그려 놓았더군요. 그만큼 다른 자리의 사람들이 바뀌고 우리도 이르쿠츠크에서 열차를 한 번 갈아타면서 많은 일들이 생긴 것이지요. 두 번째 열차를 탔을 땐 반대편 창가에 앉은 할아버지가 계셨고 우리 칸에 빈자리 한쪽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가모(정확한 발음 일진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타셨습니다. 심지어 한국말도 할 줄 아셨는데! 조용한 목소리로 “친구 이것 좀 가져다줘요”까지 한국말을 구사하셨습니다. 덕분에 잠시트(잠시도 잊을 수 없었던 잠시트....그 이름..)를 비롯한 하바롭스크로 가는 다국적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끝없는 질문과 호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슬슬 지쳐갈 때쯤, 우리 쪽에 사람들이 모이는 게 외국인인 우리가 있어서 뿐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대편에 앉아계셨던 할아버지가 무려 핵인싸(핵급 인사이더)였던 것입니다. 그 뒤로 인싸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절대로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 없이 항상 모든 대화의 중심이 되어있었습니다. 때로는 성인처럼 반대편에 앉은 젊은이와 상담 같은 것(알아들은 순 없었지만)까지 해주고 계셨습니다.

가모 아저씨와 인싸 할아버지가 앉아있던 옆 창가

 파란 아저씨는 제가 지어 붙인 별명입니다. 아무리 대화를 많이 해도 몇몇을 제외하곤 어려운 이름들을 외우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파란 아저씨는 이름도 알려주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위아래로 파란색 츄리닝을 맞춰 입고 대부분의 시간을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시며 독서를 하셨습니다. 의외로 하바롭스크가 아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와 함께 내리셨는데 내릴 땐 국방색 점퍼에 배낭을 메는 반전을 보여주셨습니다. 같은 기차에 탄 사람들 중 유일하게 Traveler라는 단어를 알아듣고 내가 여행자임을 모두에게 공표(?) 해 주셨습니다. 사진 속의 자세는 왠지 ‘허이짜’하는 기합이 날 것만 같아서 제목을 허이짜라고 지었습니다. 2층 침대로 올라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파란색이 참 잘 어울리던 파란 아저씨

 우리의 첫 기차에서 만났던 이완은 바디랭귀지를 몹시 잘 쓰는 러시아 친구였습니다. 처음 탔던 열차에서 이튿날인가 사흘 때였나. 이래 층 대화 소리에 깼는데, 동행하던 친구와 이완이 대화하는 소리에 깼었고, 열심히 이완은 몸짓으로 '눈 속에 맨몸으로 3번 수영하면 안 춥다. 이것이 러시아식 교육법이다'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애도 눈에다 3번 던지고, 강아지도 3번 눈밭에 던지면 러시아가 춥지 않다나... 서로 말은 영어와 러시아어를 하면서 몸으로 모든 걸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거면 우리도 한국어를 쓸 걸 그랬습니다.) 마지막에 내릴 때 “루스키 이완 도시락 받아라”하면서 자기 몫의 도시락 컵라면을 주고 내렸습니다. 사실 ‘받아라’라고 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원래 사람은 다들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법이니까요.

바디랭귀지를 기가 막히게 쓰던 '이완'

 처음 탔던 열차에는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 승무원 분이 계셨습니다. 거의 모든 시간 동안을 물걸레로 눈과 진흙으로 범벅된 객차 바닥을 닦으시던 그 할아버지를 전 일기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늦은 시각까지 승무원 할아버지는 이곳저곳을 쓸고 닦기 바쁘시다. 온수통을 치이익 소리를 내며 닦다가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을 닦지 않나, 자는 줄 알았던 그 새 또 문 틀을 참 열심히도 닦는다. 누가 알아주나 싶어도 내내 굽은 허리로.  승무원실에 붙은 젊었을 적 첫 근무일 사진이 지금 저 모습을 할 때까지 열차에 손이 안 닿은 곳 하나 없다. 곧 없어질 3등석 플리츠 카르타를 아직도 열심히도 닦는다.” 승무원실에서 간식거리를 사려고 들어갔을 때 본 사진은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이었습니다. 실제로도 그 사진을 아직도 명찰로 패용하시는 걸 보니 처음 일을 시작할 당시의 사진 같았습니다. 넓고 넓은 러시아를 며칠씩 가족과 떨어져서 열차 안에서만 일했을 할아버지에게 횡단 열차의 칸 자체는 집보다 더한 장소일 것입니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노후 열차 개선을 위해 차차 3등석을 줄여나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탔던 열차에는 3등석 칸이 집에서 직장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자 함께 이동하는 가족을 만나는 집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플리츠 카르타 3등석의 풍경

 이르쿠츠크에서 열차를 갈아탄 가장 큰 이유는 바이칼 호수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일기장에 써 둔 이르쿠츠크에 내릴 당시 소감을 보니, 침대에 누웠을 때 땅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할 것 같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아침에 이르쿠츠크 역에 내려서 첫날은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잠에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잠을 자고도 더 잠이 남아있는 우리들이 대단했습니다. 곧이어 친구와 함께 점심거리를 구하기 위해 밖을 나섰는데,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부터 찻길 옆의 아슬아슬한 인도에까지 눈이 무릎 높이로 쌓여있었습니다. 낡은 집 지붕에도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이 쌓여있어서 마치 우리는 우리가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사냥을 나가는 동물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베리아 한복판이 또 맞긴 합니다.

 다음날 저흰 이르쿠츠크 버스 정류장에서 리스트비얀카로 가는 버스를 찾아 나섰습니다. 사실 정시에 운행하는 버스 편은 너무 늦어서 그냥 버스 정류장 근처에 대어져 있는 승합차 중에서 키릴 문자로 리스트비얀카라고 쓰여있는 차를 무작정 탔습니다. 언제 출발하냐는 물음에 기사 아저씨는 모른다고만 답합니다. 그래도 이르쿠츠크 버스정류장과 시장을 돌고 나니 어느 정도 사람이 채워져 출발을 했고 바닥에서 따뜻한 히터 바람이 올라와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니 창밖엔 하얗게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이칼 호수가 세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느꼈습니다. 첫 번째는 청록색의 투명한 얼음장이었습니다. 너무 투명해서 아래에 여러 갈래 가있는 금과 기포까지 보이지만, 그 두께가 결코 얕지 않아 속은 들여다볼 수 없는 그래서 처음엔 무섭다가도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란 안도감을 주게 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청록색의 바닥과 두껍게 쌓인 이미 깨졌다 얼어붙은 얼음 조각들이 마치 남극 대륙을 홀로 탐험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해 주었습니다.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면 바이칼과 인접한 리스트비얀카의 빙판은 세상에서 가장 큰 스케이트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느낀 두 번째 모습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가족들이 마음껏 뛰어놀며 추운 겨울을 이겨나갈 수 있는 곳, 연인이 함께 원을 그리며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호버크래프트에 행글라이더까지 다니고 온 동네 애완견들까지 나와선 미끄러운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호수는 겨울이 되면 동네 모든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모습은 이르쿠츠크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느낀 모습입니다. 두 번째 기차는 바이칼 호수를 둘러 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가는 동안 기차의 식당칸에서 맥주를 먹으며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앞의 사람 발길이 많이 닿은 호수와 달리 기차가 지나가는 넓은 얼어붙은 호수는 그 위에 차분하게 쌓인 눈 덕에 순백의 지평선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첫 번째 모습: 청록색의 투명한 얼음장
두 번째 모습: 동네 모든 사람들의 놀이터
마지막 모습: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이칼 호수
바이칼 호수를 둘러 지나가는 두 번째 열차

 저는 무엇이 그렇게 저를 잡아당기는지 교환학생을 하는 내내 눈이 쌓인 곳만 찾아다녔습니다. 아무도 아직 밟지 않은 눈은 계속해서 발자국을 남겨달라 저를 부추겼고 저는 또 마지못해 바이칼 호수에서도 굴러다녔습니다. 어렸을 적 눈이 자주 내리지 않는 곳에 살던 아쉬움을 이렇게 달래나 봅니다. 밤에도 얼어붙은 땅은 계속되었는데 비단 바이칼 호수뿐 아니라 기차가 달리는 옆 모든 강과 초원은 얼어붙어있었습니다. 밤에 차갑게 식은 창문에 머리를 대고 밖을 바라볼 때면 희미하게 보이는 눈밭에 마치 하얀 눈토끼가 뛰어노는 그리고 그 뒤를 제가 쫓는 상상을 했습니다.

이런 눈밭을 언제고 상상했습니다

 다시 두 번째 열차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T군을 빼먹을 수 없습니다. 우연히도 우리 옆 침대엔 한국인 심지어 우리와 동갑인 친구 T군이 타고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마냥 같이 여행을 했던 것처럼 금세 친해졌고 저와 T군은 보드카를 파는 매점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정차역마다 내려서 영하 20도에 가까운 바깥에 반바지에 롱 패딩 바람으로 달려 나갔다 왔습니다. 물론 다리가 엄청 시려서 손으로 거의 다리를 비비면서 달려갔습니다. 한 번은 매점에서 따뜻한 닭다리를 파는 것을 보고 한 덩이를 사서는 기차 안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먹지도 않고 달려갔는데, 그 잠깐 사이에 닭다리가 다 식어버려서 속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반바지만 입고나온 저와, 슬픈 사연이 있는 닭다리


 T군과는 도시락에 러시아 군인들이 먹는 식이라며 분홍 소시지를 조각조각 내고 인스턴트 매쉬포테이토까지 넣어서 러시아 군인 특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다시 생각하고 보니 처음 모스크바에 갔을 때 만든 어이없는 부대찌개와 비슷한 느낌이 납니다. 한 번은 역 밖에 강아지가 있길래 유기견인 줄 알고 춥겠다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밤에 저희 칸 안에서 짖는 소리로 저를 깨운 동승객이었습니다. 그렇게 저희 칸 안에는 저와 친구들과 하바롭스크로 가는 가모 아저씨를 비롯한 우즈베키스탄분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강아지 몇 마리가 함께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지막 날이 횡단 열차에서도 왔고, 그날 새벽 하바롭스크에서 정차했을 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우르르 내리는 그래도 정든 노동자분들에게 눈인사를 나눴습니다. 특히 가모 아저씨께는 조심하라고 당부도 했습니다. 조심하라는 말을 안부인사로 받아들일 만큼 한국어에 능숙하신진 잘 모르겠지만, 마음은 통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날 일기에는 길었던 '집으로 가는 길'을 마치고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는 설렘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반대로 T군은 그 날 기차에서 귀국 편 비행기를 취소했고 예정에 없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다랐을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릴 때쯤에는 빈자리가 많이 남아 파란 아저씨, 그리고 강아지 몇 마리와 함께 탄 러시아인 가족 그리고 저와 친구들 정도만이 객차에 남아있었습니다. 함께 며칠간 생활을 했어도 아직 다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사람들과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친구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가 남은 마지막 여행이라는 아쉬움과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대감이 공존하는 채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인 기차와의 이별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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