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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May 06. 2018

모스크바에서 부대찌개 끓여먹기

우리는 왜 이리도 무모할까?

 우리는 때때로 무모해질 줄 알아야 한다. 멍청하게 원하는 것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과정이 새로운 발견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가 무모하게 원하던 것은 단지 부대찌개였을 뿐이다.
- 2016 겨울, 모스크바에서

 입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골목길 담벼락에 기대어 만두를 먹고 있습니다. 작은 쪽문처럼 보이는 가게 입구엔 '만두'라는 글씨가 흰색 테이프로 붙어있습니다. 눈앞의 8차선 도로에선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달리고, 모든 자동차들이 타이어 휠부터 보닛 아래까지 시꺼머케 때가 타 있습니다. 아마도 이건 쌓인 눈의 여파인 것 같습니다. 이때, 긴 코트를 입고 긴 코를 가진 서양인이 다가와 불 있냐고 손짓으로 물어봅니다. 친구가 라이터를 건네자 이내 주머니에서 두툼한 시가가 나옵니다. 그 남자는 감사인사를 건네고 유유히 사라집니다.

 혹시 이국적인 느낌을 갑자기 받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여긴 2016년 마지막 주의 모스크바입니다. 긴긴 비행이 끝나고 세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내려 공항철도를 타고 모스크바 역에 도착했을 땐 분명 해가 진 깜깜한 밤이었는데 뭣도 모르고 다니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벌써 2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아침을 먹을 때 까지도 해가 뜨지 않고 점심부터 뉘엿뉘엿 해가 지더니 하루의 반 이상이 깜깜한 밤이었던 순간들을 말입니다.  

분명히 아침인데,, 모스크바 역 앞에서의 하늘

 아까 전에 시가를 물던 이방인 (아차, 저희가 이방인이군요)을 만난 곳은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러시아에 처음 도착하고 에어비엔비를 처음 써서 잡은 게스트하우스의 체크인을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던 중이었지요. 기억을 더듬어 러시아의 첫인상을 찾아보면, 하얀색과 회색빛이 난무하던 곳으로 기억됩니다. 눈 덕분에 도로는 아스팔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흰색이었고, 눈에 반사된 빛들이 흩어져 온 세상이 더 하얘보이기도 했습니다. 

크렘린 궁과 붉은 광장
오전 11시의 성 바실리 대성당
온통 하얬던 2016년 겨울의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그렇게 첫날 아침부터 모스크바의 상징인 붉은 광장과 성 바실리 대성당을 본 뒤, 크리스마스(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로 저희가 갔을 때 한창 성탄 준비 중이었습니다.)를 준비하는 놀이동산과 굼 백화점을 뒤로하고, 시몰렌스카야역 근처에 있던 게스트 하우스까지 캐리어를 끌고 대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앞서 말한 것을 조금 번복하면 성탄절 적분인지 휘황찬란한 금색 조명들도 한몫을 했습니다. 

금색으로 물든 굼 백화점

 게스트 하우스는 거대한 사거리의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처음엔 문을 찾느라 건물을 한 바퀴 빙 돌고, 중세 무슨 건물인 마냥 입구 아치가 조각되어 멋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런 건물이 앞뒤로 몇 블록씩 줄지어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여행이 익숙하지 않았던 그 당시 시몰렌스카야역 근방은 마치 집인양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와 제 동네 친구들이었던 우리는 주변을 익숙한 지명에 빗대어 부르고 다녔습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 강은 수영강, 모스크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광안대교라고 부르는 식으로요.

 저희가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는 벽면에 6칸짜리 캡슐이 붙어있는 캡슐호텔 비슷했고, 안쪽에 들어가면 한 사람이 자기에 딱 맞는 아늑한 공간이었습니다. 부엌이 공용이었고, 냉장고엔 각자의 이름을 적어서 비닐봉지에 넣어두고 먹었습니다. 러시아에서의 물가는 게스트 하우스가 처음이었던 우리도 그곳에 녹아들게끔 해 주었습니다. 점심에 길에서 돌아다니다 아르바트 거리나 그리스도 대성당 근처에서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들어가면 인당 2~3만 원이 나왔는데, 저녁거리를 살 겸 장을 보러 마트를 가면 3~5만 원 이서 남자 다섯이 저녁은 물론 야식과 다음날 아침까지 거뜬했습니다. 그래서 저흰 매 저녁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곤 했었죠.

샤슬릭, 펠메니, 토끼 고기 양배추 쌈과 사워크림 스프
СМОЛЕНСКИЙ ГАСТРОНОМ에서
매일 요리해서 먹었던 저녁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컵라면 6개를 포장해온걸 뒤늦게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든 생각은 모두 라면을 끓여먹자가 아닌, 요리를 하자였죠. 너무 저녁을 해 먹는 거에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요? 게다가 줄곧 김치 먹고 싶다는 얘길 하던 참이었기 때문에, 이왕 만드는 거 근사한 부대찌개를 만들자는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부대찌개 만들기!                                                   (*주의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1. 우선 마트에서 장을 봅니다. 숙소에서 지하도로 내려가 길을 건너면 СМОЛЕНСКИЙ ГАСТРОНОМ라는 이름의 24시 마트가 있었습니다.

2. 적절한 장을 보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기운을 차리고 요리를 시작합니다.

3. 우선 김장을 나름 해야 하므로 배추에 red pepper를 뿌리면 김치 맛이 나지 않을까요?

4. 아차, red pepper가 매운맛이 없고 그냥 새빨간 파프리카 가루였네요. 실패한 김치를 옆에 둡니다.


5. 라면을 끓이고, 사온 햄과 만두를 넣고 익힙니다.

6. 아차 만두가 우리 생각과 달리 감자만두네요! 그동안 고기만두 잘 먹고 다녔는데, 하필 마트에서 고른 건 왜 이럴까요.


7. 참치캔일 확률 30%로 사 온 통조림이 꽁치캔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그래도 참치찌개와 비슷한 맛을 기대하며 조금 넣습니다.


8. 마지막으로 아까 실패한 김치도 넣어 김치 부대찌개의 느낌을 내줍니다.


9. 아이쿠, 여러분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10. 지금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성공할 순 없잖아.

 

 비록, 부대찌개는 먹다가 남겼지만 맛을 표현하자면 불어 터진 면발에 맵지 않은 red pepper덕에 밍밍한 국물의 라면에 꽁치 비린내 조금, 그런대로 햄이랑 만두는 괜찮게 익어서 둘은 먹을만했던 음식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망한 게 뻔한 부대찌개지만 덕분에 추운 겨울 모스크바에서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만든 저녁이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여행 다니면서 이것저것 해 먹고살려면 요리 연습은 좀 더 해둬야 될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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