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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Aug 01. 2019

차창 밖은 아름다워 2

내가 사랑한 풍경에 관한 이야기

4.  

 저번 글에서 교환학생을 갔을 때 '차창 밖은 아름다워'라는 이름을 떠올려 생각난 세 개의 장면을 썼는데, 교환학생이 지나고도 더 골똘히 생각했을 때 몇 가지의 장면이 더 떠올랐다. 그중 하나는 예전에 말레이반도 종단 여행을 할 때 태국과 말레이시아 국경에서의 장면이다. 정확하게는 태국의 핫야이에서 국경 지역인 파당 베사르까지 타고 간 태국 열차에서의 장면과 파당 베사르에서 환승해 말레이시아의 버터워스까지 타고 간 기차에서의 장면이다.

 국경을 지난다는 설렘과 전날 역에서 쪽잠을 잔 덕에 비몽사몽으로 본 그 풍경은 마치 아마존 열대 우림 속을 기차로 뚫고 가는 듯한 파노라마였다. 열차 안의 선풍기가 차마 창문으로 들어오는 습함을 다 내쫓지도 못한 채 창밖엔 잎이 넓은 나무와 땅에서 높게 지어진 집들이 지나갔고, 국경에 다다라서는 태국의 남쪽 끝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그때 본 습한 녹색은 시간이 오래된 탓도 더해져 영사기에서 틀어진 필름 영상의 한 장처럼 남아있다.

 그렇게 기차에서 내렸다. 태국 출국심사와 말레이시아 입국심사를 차례로 받고, 말레이시아의 KTM 통근열차로 갈아탈 차례였다. 있는 현금, 태국 바트와 말레이시아 링깃을 끌어모아 표를 샀고 아마 우리와 함께 내린 대부분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승강장으로 향했다. 말레이시아에서 탄 열차는 조금 더 현대적으로 생겼고, 기차보단 지하철에 가까운 내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린 태국과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 사이 몇 안 되는 여행객이었고 열차 안은 금세 직장인들과 통학생들로 북적였다. 뒤로는 계속해서 차창에 나뭇가지가 닿을 듯 말듯한 숲과 한국의 바위산들과 다르게 나무가 무성한 낮은 봉우리들이 지나가면서. 

5.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 안에서는 이리저리 복잡한 글귀와 건물이 가득한 도시 풍광보다는 일관적인 자연이 더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일관성 있기로 제일이라 함은 아마도 사막일 텐데, 모로코 탕헤르에서 마라케시까지 가는 기차는 황무지 같은 땅에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이미 모로코에서 탔었던 기차에서의 이야기는 글로 한 번 쓴 적이 있기에 사람들 이야기보단 풍경 얘기를 짤막하게 써야겠다. 가장 많이 봤고 또 기억에 남는 풍경은 모래 벌판 위에 듬성듬성 자라 있는 알로에 같은 사막 식물들이었다. 또 가끔씩 짝을 이뤄 가방을 메고 등교인지 하교인지 애매한 시각에 먼길을 걸어가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먼 길이라 한 이유는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본 가장 가까운 마을이 나로서는 도저히 걸어갈 자신이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넓게 본다면 사하라 사막의 거의 서쪽 끝을 훑는 기차라 그래도 곳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거의 모래와 같은 색을 가진 창문이 작고 지붕이 넓은 네모반듯한 집들이었다. 듬성듬성 그런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내 마을이 나오고 그러다 다시 황무지를 반복하며 열차 안에서는 다양한 사람이 타고 내리던 그런 한낮의 풍경이었다.

 

6. 

 교환학기가 끝날 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한번 타고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를 이동해 보니, 부산에서 대전까지 가는 무궁화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부산에서 학교가 있는 대전까지 무궁화호 열차를 끊었는데, 누워있는 것과 앉아있는 것의 차이는 무시 못할 차이었다. 횡단 열차에서는 누워만 있어도 되었지만, 앉아서만 이동해야 하는 무궁화호에서는 차마 잠에 들지 못해서 더 길게 느껴졌다. 그제야 자주 다니던 철길이지만 잠에 들었거나 KTX를 타느라 보지 못한 산맥을 보았다.

 마침 해가 또 질 무렵이라 구름 사이로 분홍빛 물든 하늘과 어두워지는 땅을 가로지르는 산의 모습은 내가 그땐 한국이 오랜만이었어서 그런지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산등성이를 따라 뻗어 있는 선을 능선이라고 한다. 능선을 따라 노을과 그림자가 갈라지는 모습을 어서 빨리 외국인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능선을 마땅히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SNS에 그냥 NeungSeon(a Korean word meaning silhouette of mountains)라고 적었다. 무언가 산의 모습과 그 "능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느낌이 비슷해서 단어까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 지나치던 풍경을 새로 발견할 수 있는 게 길게 여행을 다녀온 뒤의 장점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 이후로는 풍경이 아름다운 기차를 꼽으라면 무궁화호를 항상 순위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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