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Aug 05. 2019

신들의 땅 아테네

아테네에서 만난 신은 사람

 "나 여기서 플라카 지구를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스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아테네에서의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분명 그 일이 있기 전까지의 아테네의 모습은 너무나 화창하고 가로수엔 오렌지 나무가 무성한 것이 '이곳은 분명 신의 축복이 있던 곳일 거야'라고 생각하게 했었고, 아테네의 첫인상은 에어비앤비를 함께 썼던 중국인 투숙객의 생일파티로 인해 친근한 곳이 되어있었습니다. 아테네 공항에 굉장히 늦은 시각에 도착해서 빨리 씻고 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에어비앤비로 잡은 숙소의 부엌이 시끌벅적한 것이었습니다. 속으론 '아 이런 파티가 잦은 분위기의 숙소인가 보다. 망했구나.'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시러 부엌에 발을 디디자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친구가

"미안해, 많이 시끄럽지? 오늘이 내 생일이라 집주인 허락받고 친구들을 불렀어. 오늘만 이해해줬으면 해. 혹시 너도 뭐 좀 마실래? 맥주? 와인?"

 이라고 말을 해주었고 속에 있던 화가 다 녹아내렸습니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나 소중한지 오랜만에 느끼게 해 준 순간이지요. 그렇게 저도 파티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 친구들과 몹시 달았던 전통 디저트도 나눠먹고 와인을 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꾸만 멤버가 바뀌어 이름을 수십 번씩 나눈 것 같지만, 동네 주민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께서 본인이 한국에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다고 "엄마, 이모, 삼촌"정도의 단어를 안다며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경제위기의 이야기도 잠시 오갔었는데, 제가 그 사태 이후로 그리스 여행이 걱정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니 지금은 괜찮다고 안심을 시켜주면서도 경제위기 이후로 탈 그리스를 외치는 청년들이 늘어났단 얘기도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 사람들이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씁쓸한 이야기도 해 주었지요. 그래도 그렇게 그리스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한창 기분이 좋아졌고 사람에 대한 경계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한창 파티가 끝이 나고 다음날, 숙소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던 아크로폴리스를 보러 언덕길을 올랐습니다.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이 땅을 두고 벌인 경쟁에서 에테나 여신이 이 곳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올리브나무를 보면서 그리고 화려한 물류 이동의 중심지 었을 에게해를 바라보면서 왜 포세이돈과 아테나 두 신이 이 곳 아테네를 두고 경쟁했을지 조심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서 또 다른 두 언덕인 리카베투스 언덕과 필로파포스 언덕에 올라가 꼭 파르테논 신전의 야경을 찍겠다고 봐 두고, 한참을 구경하던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왔습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로 내려오기만 하면 다양한 악사들과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 그리고 올리브나 땅콩과 같은 간식을 파는 카트도 있는 길을 지나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플라카 지구가 있습니다. 물론 진품은 아니겠지만, 역사책 속에서나 보던 붉은 진흑에 검은색으로 그려진 그림이 있는 항아리 그리고 도자기와 동상들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번성하던 고대 그리스에서의 상점가 같았습니다. 그 길목에서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뚱뚱한 스페인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나 여기서 플라카 지구를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스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다 온 길목에서 플라카 지구를 찾고 있는 점도, 제가 만났던 그리스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잘했는데 굳이 동양인이 저에게 물어본 점도 이상하기만 하지만 그땐 전날의 파티와 교환학생 생활을 하느라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난 덕에 경계심 없이 지도를 보며 답을 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짧은 스페인어로 설명을 해 줬더니 여기 와서 너처럼 친절하고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서 기쁘다고 같이 커피나 한 잔 하러 가자는 것입니다. '응? 플라카는 어디로 가고?' 아무튼 여기서 조금 석연찮은 느낌을 받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뜨려는 저에게 본인이 대접하고 싶다고 5분도 시간이 없냐는 말이 선심처럼 들려서 '그래 5분이면 그 정도는 별 일 있겠어'하고 따라나섰습니다.

 가는 도중에도 저기 보이는 호텔이 본인이 묵고 있는 호텔이라고 소개하며, 본인은 스웨덴의 건설회사에서 일하고 제가 덴마크에서 교환 학생을 했다고 하니 코펜하겐 근처의 말뫼라는 도시를 아냐며 그곳의 건축물까지도 읊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인 얘기를 계속하며 제가 긴장을 풀거나 대화의 실마리를 제공하게끔 유도했는데 역시나 사기꾼의 자질 중의 하나는 넓고 얕은 지식일 테니 아마 저와 같은 사람들을 현혹하게끔 공부를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커피를 사준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두껍고 커다란 문을 열어야 들어갈 수 있는 어느 바였습니다. 밖은 대낮이었는데 안은 어두침침하고 오래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그리고 바 테이블이 중앙에 보이고 룸과 테이블들이 보이는 음침한 바였습니다. 완전히 밖과는 다른 세상이 나타난 거지요. 대뜸 맥주가 괜찮냐길래 일단은 괜찮다고 말하고 최대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이상한 점은 없었고, 갑자기 본인이 여자를 불러서 같이 마셔도 되겠냐는 말에 '내가 신경 쓸 일 아니니 알아서 하라'라고 했고 저는 맥주만 몇 모금 마셨습니다. 공교롭게도 바텐더를 하던 중년의 여성은 한국인이었고 본인은 이곳으로 이민을 온 지 오래되었다고 최근의 한국을 묻는 둥 간혹 개인사를 묻는 둥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한국어로 얘기를 하다가도 영어로 통역을 하고, 옆에서 스페인 아저씨는 계속 보드카를 들이켜다가 갑자기 저에게

"나 이 여자에게 술을 사 줘도 되겠니?"

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아니 그쪽이 계산할 술인데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뭔가 이상해서 나한테 왜 물어보냐 하니깐 당연하 더치페이라고 심지어는 본인이 마신 술과 바텐더 아줌마가 마신 술 그리고 자기가 부른 여성이 마신 술까지 제가 부담해야 한다고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 바텐더 아줌마도 그때부턴 영어만 사용하면서 원래 유럽은 모두 더치페이다, 당연히 오기 전에 둘(저와 스페인 아저씨) 이서 계산은 합의를 보고 와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제가 돈을 내야 하는 것처럼 얘기를 했습니다. '아이고 이거 잘못 걸렸다, 여행에 와서 사기를 당하는 게 이런 방식이구나' 싶었는데, 그 와중에 정말 교환학생 막바지라 돈도 없어서 "난 정말 이해할 수 없고, 학생이라 돈이 없어서 못 낸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거의 울다시피 말을 했죠. 

 그랬더니, 학생이면 할인을 해 줄 수 있다며 원래 80유로 정도를 내야 했던 가격을 70유로 정도로 깎아주는 것입니다. 그때 든 생각이 

'아 여긴 정말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가격을 책정했구나.'였습니다. 정가가 있었다면 저렇게 어이없는 학생 할인을 들먹이진 않았겠다는 게 제 생각이었고 사기라는 게 확실해지자 뭔가 억울함과 정의감 그리고 화가 솟아났습니다. 

"난 여기 와서 마신 건 이 맥주뿐이고 근데 나머지 술은 다 너네가 마신 와중에 난 저 스페인 사람이 마실걸 사준대서 따라온 것이다. 돈은 저 사람에게 받아라. 나는 모르겠다."

스페인 아저씨는 본인은 모르겠다는 표정, 바에 있던 여자는 내가 이렇게 나오니 불쾌하다는 표정을 내비치고 그리고 바텐더 아줌마는 계속 세상 물정 모르는 호구로 보고 막 화를 냈습니다. 

결국 "그럼 좋다 나머지는 이 스페인 사람한테 받을 테니, 맥주값만 내라."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메뉴판을 보니 맥주 한 병이 10유로인 겁니다. 물론 바니까 비쌀 수도 있다 싶은데, 저는 저 스페인 아저씨가 사준다고 해서 온 거고 돈을 내는 것 자체로도 억울해서, 여기서 더 나가서 선수를 쳤습니다.

"아 여기 맥주 반이나 남았는데 네가 반 먹고 5유로 낼래?"라고 스페인 사람에게 당당히 얘기했고, 저에게 사기를 치려던 패거리는 적잖이 당황해 보였습니다.

아줌마는 마지막 수로 "How much you can pay?(너 얼마나 낼 수 있니?)"라고 물어봤습니다. 물론, 이때까지 계속 영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맥주쯤 마트에 가면 3유로 안되게 살 수 있으니, 3유로를 내겠다고 했고 그럼 아줌마는 3유로를 내고 가라고 했습니다. 

"3유로 낼 테니 카드리더기 가져와달라."

고 제가 마지막으로 말을 하자, 줄곧 영어로만 저를 상대하던 그 바텐더 아줌마가 한국어로 고래 소리쳤습니다.

"꺼져!"


 부리나케 처음 이곳을 들어왔던 두꺼운 문을 밀고 나가서 밝은 밖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그곳 안과 밖이 다른 상황이어서 방금 상황이 너무 사실 같지 않았고 그럼에도 무서워서 손과 발이 다 떨렸습니다. 혹시나 쫓아와 해코지를 할까 봐 저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으로 숨어들었고 (설마 입장료를 내고서까지 저를 쫓진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진정을 하고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아 돈도 뺏기지 않고 다치지도 않고 돌아왔지만, 만일 그 바에 총칼을 든 강도가 있었다면, 만일 제가 마신 술에 약이라도 탔다면 무사히 숙소로 돌아오지 못했을 위험한 상황이었고 그 일이 있고 나서 이곳 아테네가 너무 지옥같이 무서운 곳으로 느껴졌습니다. 남은 여행을 다 마무리할 수 있을지, 정말 찍고 싶었던 리카베투스 언덕에서의 야경은 거의 포기한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사기꾼을 만나 여행을 망쳐야 하는지 억울하기만 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축복받은 땅이 지옥으로 내려앉았습니다. 


 그런 감정을 다시 추켜세운 것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어떻게든 여행은 지속해야 할 것 같아서 열심히 동행을 구한 것이었죠. 다행히도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연락이 와 있어서 동행으로 형 누나들을 만나 오랜만에 혼밥이 아닌 식사를 했습니다. 함께 리카베투스 언덕의 야경도 보고 싶어서 혼자였다면 무서워 오르지 못했을 골목길을 올라갈 수 있었고, 가는 길에 가로수 오렌지 나무를 몰래 맛보기도 하고 (맛은 매우 시기만 했답니다.) 백년초 선인장 구경도 하면서 정상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서 본 노을은 몹시도 감격스러웠습니다. 아직 빨갛다기보단 노란색이 가까운 하늘을 배경으로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저는 바라던 대로 불이 켜진 파르테논 신전을 노을 진 에게해를 배경으로 찍을 수 있었습니다. 

  계속 웃고 떠들며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는데 우연찮게 저녁식사를 하러 알아봐 둔 레스토랑이 제가 사기를 당할뻔했던 바와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워낙 헐레벌떡 달아났고 들어갈 때도 아무 의심 없이 들어갔어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그 근처였다고 조심하라고 동행들에게 얘기를 했고, 그제야 무언가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자칫하면 트라우마로 남을 뻔한 기억이 좋은 동행을 만난 덕에 희석이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젤라토를 먹으러 가는 길이 제 숙소와 멀어지던 방향이라, 돌아가는 길에 동행 분들이 끝까지 걱정을 해 주었고 저는 삼각대가 있다며 농담을 하며 무사히 또다시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아테네에서 숙소로 들어가는 어제와 같은 길이 하루는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무섭게, 그 날은 어둑한 밤이었음에도 괜찮게 느껴졌습니다. 제 행동과 감정을 모조리 잡고 뒤 흔들던 주체는 신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여행지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 그곳에서 제가 느끼던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음에 아테네에서 제가 만난 신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다행히도 저는 아무 일 없이 사기를 당하지 않고 나왔지만, 무엇보다도 여행지에선 모른 사람이 접근해 온다면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아테네와 같은 관광지에서 "What time is it now?", "Can you speak English?"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냐며 다가오는 같은 수법의 사기꾼을 이후에도 종종 목격했습니다. 

이전 12화 짜장면과 파리와, 칫솔의 관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