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예쁜 곳인 줄 나도 잘 모르는 내가 사는 곳.
G는 올해만 다섯 번째 만난, 햇수로 세면 만난 지 7년이 넘어가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친구입니다. 친한 친구를 다섯 번 만났다는 게 의아할 수 있지만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떨어져 있는 동안 런던에서 한번, 한국에서 한 번씩 만나고 오스트리아를 함께 여행하고 제가 덴마크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중에 덴마크를 두 번이나 찾아 다섯 번을 만난 이례적인 친구입니다. 워낙 둘 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사가 넓어 또 최근 졸업 과제로 공학적인 요소들이 필요해 (도움이 되는진 모르겠으나) 제게 조언을 종종 듣곤 해서 저번에 오스트리아에서 만났을 때도 자동차 브레이크에서부터 면역의 역사까지 다양한 시답잖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 G가 제 기숙사에 놀러 오기로 했고, 저번에 덴마크를 왔을 때에는 저도 이곳을 잘 몰라 뉘하운 만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는데, 이번엔 제가 있는 륑뷔의 사슴공원까지 데리고 갈 계획입니다.
첫날 G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저는 수업 중이었고, 저번에 왔던 길이기도 하고 이미 덴마크 교통카드 rejsekort도 갖고 있어서 따로 마중을 나가진 않았습니다. 뭔가 영화에서 처럼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공항 마중을 생각해봤지만 현실적인 G와 저 덕에 매번 만난 곳은 학교 앞 버스정류장, 중앙역 아니면 애플스토어.. 아무튼, G는 오는 길에 네토에 들려서 (네토는 유일하게 덴마크 물가 속에서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마트입니다.. 제 사랑 네토) 돼지고기랑 칠리소스를 사 가지고 왔고 저는 그 날 교수님이 15분 만에 갑자기 강의를 끝내셔서 연습반 직전에 빠져나와 G를 만나자마자 점심을 함께 해 먹었습니다.
최근 들어 카메라에 푹 빠진 특히 그중에서도 장노출로 찍는 야경에 푹 빠진 G는 당연히 덴마크에 도착하자마자(사실 덴마크에 온 이유이기도 한) 뉘하운의 야경을 보러 갔습니다. 마침 크리스마스 마켓을 열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낮의 뉘하운 만큼 다양한 파스텔 톤의 색채를 보여주진 않지만 붉은빛의 불빛 장식을 하고 있어 걱정했던 스산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gløgg [북유럽의 와인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음료]와 달콤한 캐러멜 시식을 하고, 아기자기한 트리 장식들 덴마크 국기 문양을 한 헹거나 스노우볼들을 보며 방에도 작은 트리를 하나 두고 싶다거나 다 같이 모여서 트리 꾸미기를 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가난한 그리고 곧 떠날 교환학생은 방에 트리를 둘 여유가 없어서 울며 조만간 화려하게 필 코펜하겐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기대합니다.
G의 표현을 빌리면, '길거리 점괘가 더 잘 맞는' 덴마크의 일기예보는 비가 온다고 되어있었으나 창밖은 오래간만에 쨍쨍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벼르고 있던 륑뷔의 사슴공원을 갔었습니다. 이곳 덴마크에 교환을 오기 전부터 종종 찾아 여유를 부리기 좋은 공원이라는 후기를 읽어 기대를 하고 있었고 지난 인디언 써머[북미, 북유럽에 찾아오는 10월 말의 고온 현상]에 처음 찾아 날씨를 즐기다 왔었습니다. 전부터 G가 꼭 사슴공원을 갈 때 불러달라고 했고 저도 륑뷔에서 자랑할 만한 곳을 찾아 뿌듯해 함께 사슴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혹시나 덴마크를 방문해 찾아오신다면 Hjortekær Port를 찍고 오시면 입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헌팅 로지까지 향하는 길엔 양 옆으로 넓은 녹지(골프장 겸..)가 펼쳐져 있고 곳곳에 크고 작은 호수가 있습니다. 장난 삼아 호숫물에 손을 담그러 갔다가 그곳에 사람발자국이 아닌 사슴 발자국만 한가득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돌아왔었습니다. 그만큼 사슴 수백 마리가 자유롭게 뛰어노는 곳입니다. 저희가 간 날도 길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사이에 사슴 떼가 쉬고 있었고, 멀리서 볼 땐 저게 다 사슴이야? 할 정도로 작은 점들로 (·····) 이렇게 보였습니다. 커다란 사슴만 있는 줄 알았는데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귀여운 사슴들이 뿔이 달린 대장 사슴을 따라 쪼르르 어린 사슴들이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어째 저희가 걸어간 만큼 가까워지지 않는 느낌입니다. 워낙 경계심이 많은 초식동물들이라 사람을 피해 이리저리 다니고 뿔이 있는 대장 사슴들은 저희랑 눈을 마주치며 경계하기 바빴습니다. 결국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사슴 몰이만 하고 해탈한 저희는 반대편으로 걸어가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잔디밭까지 걸어갔다 왔습니다. 오는 길에 들른 주유소 편의점에서 G는 50크로네짜리 코펜하겐 핫도그를 시켜 먹고 인생 핫도그를 찾았다며 적당히 토스트 된 빵이 너무 환상적이었다고 극찬을 했습니다.
요샌 저번에 G가 덴마크에 왔을 때 보다 해가 짧아져 오후 4시면 노을이 지니깐 사람이 서두르게 됩니다. 반대로 아침엔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져 사람이 늘어지게 되고요. 다들 겨울에 북유럽으로 교환을 간다고 했을 때 만류했던 이유가 이것인 듯합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방에 들어와 각자 장 봐온 재료로 기숙사 부엌에서 다른 교환학생들과 저녁을 해 먹고 맥주를 마시다 마지막 날은 오후 느지막이 나가 코펜하겐 시내에 있는 덴마크 디자인 뮤지엄을 가기로 했습니다. 학생이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뮤지엄이라 부담 없이 코펜하겐에 들를 때마다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된 시내의 저택이었을 것 같은 건물에 ㅁ자 구조를 그리며 서너 가지의 테마로 이루어진 전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Learning from Japan이라는 이름으로 서양 미술에 일본 화풍이 어떻게 들어갔는지에 대한 전시와 덴마크 의상 디자인의 변천사 그리고 현대 덴마크 디자인에 대한 전시가 있었습니다. 가장 관심이 가는 전시는 무엇보다도 북유럽 느낌으로 회자되는 현대 덴마크 디자인 전시였습니다. 방금 막 주방에서 쓰이고 있을 것 같은 주방기구부터 가지각색의 의자, 시내에서 자주 마주쳤던 간판의 글꼴들 덴마크인들의 필수품인 자전거에서 축산업에서 쓰일 돼지 사료 급식기까지 정말 다양한 부분에서 신경을 쓴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습니다.
G와는 그러고 미술관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두고 7년째 변함없이 잡학 사전스러운 대화를 늘어놓았습니다. 커피를 시켜두고 에스프레소랑 필터 커피의 추출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각설탕을 넣어먹는 걸 보더니 당뇨에 관해서 궁금해졌나 봅니다. 이런 공대스러운 얘기 말고도 찬찬히 카페를 살펴보다 갑자기 질문을 던집니다.
"넌 천장이 높은 좁은 집이랑 천장은 좀 낮아도 넓은 집이랑 어디가 낫다고 생각해?"
저는 넓은 집 G는 높은 집을 골랐습니다.
확실히 지금 배우는 전공도 다르고 위처럼 사소한 취향 차이도 명확하지만 둘 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고 그래서 대화하는 거 자체가 즐거운 친구라 일 년에 다섯 번씩 만나도 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장소가 좀 큰 스케일로 바뀌는 점도 있지만요. 마지막에 륑뷔역에서 공항으로 가는 G를 배웅했는데, 이젠 제 방에서 공항 가는 길이 익숙하다고 하면서 익숙한 여행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줄곧 새로운 나라, 새로운 여권 도장에 눈을 부릅뜨고 여행을 해 왔어서 아직 갔던 도시를 다시 여행해본 적이 없지만 G는 올해만 파리를 3번이나 다녀왔습니다.
"나 이번에 한국 돌아갈 때 재작년에 갔던 모스크바 들렀다 가는데 그럼 좀 느낌이 비슷하려나?"
"아마 아닐걸..?"
여행지에서 새로운 곳이라는 설렘을 내려 두고 긴장감이 어느 정도 사라졌을 때 느끼는 도시의 풍경과 분위기는 단순히 방문했던 곳을 다시 간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인 모양입니다. 저는 언제쯤 그러한 여행지가 생길지 하지만 아직은 새로운 곳을 좀 더 가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언제 또다시 만날지는 약속하기 어려워서 헤어질 때 인사는 메리 크리스마스로 대신했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닐 때처럼 자주 볼 순 없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각자에게 들려줄 재미난 이야기가 많은 그런 친구가 다녀갔던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