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Dec 28. 2018

나 혼자 산다 in 핀란드

얀네의 집에서 순록들과 함께

 헬싱키에서 열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로바니에미의 호스텔에서는 온통 오로라(Northern Light) 얘기뿐이었습니다. 뮌헨에서 온 독일인 부부는 제가 도착하기 전날 약한 오로라가 떴었다고 그랬고 비교적 가까운 오울루에서 온 친구와도 오로라 얘기를 했습니다. 산타할아버지를 만나서도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오로라를 보여달라고 했었고, 핀란드의 "공인" 산타할아버지는 "Nobody can wish that, but I can. I'll cross my fingers for you(아무도 그걸 빌어줄 순 없지만 난 할 수 있지 내가 빌어줄게)"라고 답해주었습니다. 이곳은 ""Did you see the northern light? (오로라 봤니?)"가 안부인사인 핀란드 북부 라핀란드주의 산타마을 로바니에미입니다. 하지만 제 핀란드 여행의 목적지는 로바니에미가 아닌 비사투파라는 호스텔이어서 그때마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 아직 못 봤는데 나는 좀 더 북쪽으로 가서 볼 거야."라고 말하고 로바니에미 버스 정류장에서 12인승 승합차 미니버스를 타고 더 위로 떠났습니다.

 딱히 이곳에 살지 않고서야 스키 시즌이 아닐 때 이 버스를 타는 관광객은 저뿐이었을 테고 버스엔 천방지축인 아이들이 타고 있었고 완전한 시내를 벗어나기 전까지 간간이 두세 명이 더 탔습니다. 쭉 뻗은 외길을 따라 버스는 달렸고 저는 가는 내내 끝이 보이지 않는 침엽수림이 양쪽으로 펼쳐진 모습에 카메라를 쉬게 둘 수 없었습니다만, 이내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어이, 비사투파!" 러우단요키라는 역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도 기사 아저씨는 얀네의 호스텔 이름으로 저를 깨웠습니다. 고속도로 한복판에 배낭과 캐리어 하나와 로바니에미에서 장 봐온 갖가지 식재료를 챙겨 들고 멍하니 서 있으니 이내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얀네가 차를 돌려 저를 태웠습니다. 그렇게 고속도로 샛길로 4킬로미터 남짓을 더 달리면 얀네의 농장과 호스텔이 나타납니다.

오로라를 보길 빌어주신 산타 할아버지
버스는 이곳에 날 두고 떠나갔다.

얀네의 호스텔 비사투파
아쉽지만 스키는 다음 번에

 얀네의 다섯 식구가 사는 집, 얀네의 외양간 큰 호스텔 건물과 독채 몇 채, 스키장비를 두는 창고와 호숫가 근처의 공용 사우나까지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넓은 농장이 모두 얀네의 곳입니다. 체크인을 하며 아침을 먹을 건지 물어보고 사람이 없으니 개인 사우나가 딸린 독채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보다 순록을 더 많이 보게 될지는 몰랐지요. 키를 받고 제가 나흘을 보낼 집으로 가면서 얀네는 오로라를 찍을 명소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로라가 낮게 뜨는 날에는 북쪽 호수가 잘 보이고 혹은 외양간 근처의 넓은 공터도 전봇대가 보인다는 것을 빼면 좋다고 얘길 해 주었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을 호숫가에서 별과 오로라를 보면서 기다렸지요. 숲 속을 지나 나온 넓은 호수에서 혼자 오로라를 독차지한 듯이 볼 수 있었다는 게 그리고 그게 처음 오로라를 만난 순간이라는 게 정말 춥고 무섭기도 했지만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고 기억됩니다.

잘 정돈된 주방과 개인 사우나가 있는 곳

 집에 들어서서는 침대 두 개가 있는 침실에 소파가 무려 3개씩이나 있는 거실에 화장실 반짝이나 차지하는 개인 사우나에 감탄이 나왔습니다. 사우나 안에서도 돌을 지펴서 나무 양동이에 물을 떠 뿌려 증기로 몸을 데우는 완벽한 핀란드식 사우나였습니다. 원래는 사우나 중간중간에 얼어붙은 호수를 깨고 몸을 담가야 하지만 얀네는 충분히 문 밖에만 나가도 추울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원할 때까지 사우나에 있다가 원할 때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돼, 정해진 시간은 없지만 네가 어지럽지 않고 편안해만 하면 돼."

이 것이 핀란드식 사우나의 본질이겠죠.


 사실 저도 오로라를 보러 간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했지만 낮시간을 그리고 오로라가 뜨지 않는 날은 무얼 하고 지냈는지 물어볼 것 같습니다. 그냥 완벽히 혼자 비사투파에서 지낸 시간이 또 가장 기억에 남기도 하고요. 

그래서 낮동안 무엇을 했느냐? 우선 아침 여덟 시마다 꼬박꼬박 일어나는 바른생활을 했습니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서였지요. 대신 덕분에 아침 서리가 가득 껴있는 풀밭과 나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밖이 많이 추우니 저도 목도리와 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고 길고양이도 제 품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아침엔 항상 얀네네 농장에서 바로 짜 온 우유가 있었습니다. 수줍은 얀네네 꼬마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뛰어다니다가도 저랑 마주치면 숨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직접 따온 베리로 담근 주스도 꼬박꼬박 챙겨 마시고 우리네 죽 같은 포리지에 꿀이나 잼을 넣어 먹거나 삭힌 청어 조림을 빵에 얹어 먹기도 했습니다. 청어 조림을 어떻게 먹어야 하나 싶다가 얀네를 보고 따라 빵에 먹기 시작했는데 예상외로 비리지 않고 다만 시큼한 맛에 부드러운 식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로 크리스마스 트리 같았던 서리가 낀 나무들

 핀란드 북쪽은 해가 아주 낮게 떠서 천천히 서리가 햇볕에 녹는걸 아침에 볼 수 있었습니다. 침엽수들에 얼어붙어있는 눈송이를 보며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이 모습을 따라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하루는 아침부터 두두두 천장을 울리는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식탁에서 밥을 먹다 창문 쪽에서 휙 휙 지나다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소리의 정체가 새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밖으로 무작정 나가 소리를 쫓아 딱따구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론 아침마다 창밖에 날아다니는 아이들이 새라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남는 시간 동안 노래를 듣거나 찰나에 느꼈던 감정이나 문득 든 생각들을 바로바로 기록할 수 도 있었습니다. 개중엔 서리를 보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린 것이나, 집 안의 사우나를 켜면 집의 난방이 꺼진다는 사실에서 사우나는 가족이 함께 즐길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요리는 교환학생을 와서 해외에서 직접 밥을 해 먹기 시작하면서 부쩍 재미가 들렸고, 그래서 점심과 저녁은 로바니에미에서 장을 봐온 라비올리를 해 먹거나 볶음밥도 해 먹었습니다. 라면을 많이 챙겨 왔었는데, 밤에 오로라를 찍다가 추워 자꾸 꺼내먹다 보니 마지막 날엔 결국 얀네에게 소고기와 감자를 사서 먹었다지요. 


 오후에는 주로 밖에서 활동을 하며 지냈습니다. 첫날은 농장과 숲 이곳저곳의 사진을 찍느라 시간을 보냈는데, 둘째 날 "눈이 쌓이지 않아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못하는 게 아쉽다."라고 얀네에게 얘길 했더니 대신 호수에서 보트를 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곤 건조해둔 보트도 직접 물에 대어주고 구명조끼와 노 까지 챙겨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밤에는 그 깊이도 반대편도 가늠이 가지 않고 별빛만 비춰주던 호숫가가 낮에는 넓게 펼쳐진 제 놀이터라는 게 신기했습니다. 처음 노를 젓는 건데도 시원스레 배가 나아갔습니다. 가끔씩 갈대밭에 걸려 허우적 대기도 하면서 호수를 돌아다녔고 그 와중에도 숲 속에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사실 머릿속으론 되게 양손 균형을 맞춰서 앞으로 나가고 방향 조절도 멋지게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액션캠으로 찍은 영상을 보니 내내 손 바쁘게 허우적대고 있던 게 고스란히 보여 혼자여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네요. 호수를 둘러싼 나무가 빼곡해 혼자 보기 아쉬운 절경이었는데, 그날 이후론 호수가 얼어붙어 있어서 더는 노를 못 젓고 온 게 조금 아쉽습니다.

침엽수림 울창한 자전거를 탄 풍경

 보트를 못 타는 날에 자전거를 타고 농장을 빠져나와 샛길을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야생 순록 떼를 봤지요. 얀네네 집 앞에 있는 호수 말고도 길가 숲 속엔 크고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한쪽 호수에서 길 반대편으로 흰색 동물이 지나가는걸 멀리서 처음 보고 얼어붙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강아지 내지는 고양이 일 줄 알았는데

 '아차, 여긴 한국이 아니지'

라는 생각에 자세히 보니 뿔이 보이는 게 순록이었습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순록이 동물원이 아니라 야생으로 돌아다니는 나라였구나.. 하는 게 겁이 나면서 내심 곰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첫 만남은 이렇게 멀리서 빤히 쳐다보다가 순록이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겁이 나면서도 호기심이 너무 커져서 천천히 걸어 순록이 있던 쪽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몇백 미터를 가도 순록은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노을을 보면서 달렸습니다. 한 30분쯤 더 달렸을 때 괜한 시선이 느껴졌고 그제야 오른쪽 숲 속을 보니, 수컷 순록 세 마리가 앉은 채 시선이 저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거대한 동물을 보면 얼어붙게 되는 게 혹시나 잘못 움직이면 공격해 오지 않을까라는 야생에서 익힌 본능이 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행히도 순록은 사람을 되도록 피하는 성격에 이내 세 마리가 제가 가던 방향의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제 바로 옆에도 스무 마리 즈음 되는 순록이 더 있던 것입니다. 앞에 세 마리는 결국 저를 감시하기 위한 리더였던 거지요. 그래서 더 나아갔다간 계속 이렇게 마주칠까 봐 서로를 위해 자전거를 돌려 집으로 향했습니다. 또 오는 내내 '야생 순록'을 봤다고 무서웠다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요.

야생 순록을 찾아보세요!

 이렇게 돌아오면 보통 녹초가 된 채로 사우나실을 데우고 따라 부를 수 있게 좋아하는 노래들을 선곡해두고 혼자였기 때문에 정말 마음껏 사우나를 하고 몸을 녹이면 오로라 예보 창을 세팅해두고 구름이 짙게 깔리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첫날밤 예보가 좋지 않아서 별 사진만 잔뜩 찍고 있었는데 지붕 위쪽으로 초록색 빛이 사진에 담겼습니다. 진작 호숫가로 달려갔어야 했는데, 오로라가 높게 뜰 거란 기대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리 사이로 털 뭉치가 느껴져 또 잔뜩 긴장을 했는데 아침의 그 고양이 친구였습니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아서 땅 보다 하늘이 별빛으로 더 밝아서 갑자기 곰이라도 나타날까 봐 내내 긴장을 했지요. 뒤늦게 호숫가로 나갔을 땐 이미 오로라 사이로 구름이 관통해 희미한 그림자만 볼 수 있었습니다. 

아쉽게 구름에 가린 오로라만 볼 수 있었던 첫날 밤

 다음날 밤엔 시작부터 호숫가로 향했는데, 숲을 지나는 길도 처음엔 무서웠지만 부쩍 나무들에게 정이 붙어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전세를 낸 듯이, 춤추는 오로라를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로라는 멀리서 무지개처럼 펴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 원을 그리다가를 반복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초록빛이 그렇게 강렬하지 않았지만 끝부분에선 흩날리는 자락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이끼 위에서 삼각대를 설치하고 사진에 여념이 없어서 아마 구름이 껴서 금방 들어가지 않았다면 발이 호수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숲 안에서도 오로라가 너무 좋긴 하지만 혹시나 동물이 나타날까 봐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납니다. 머리 위에 쨍 하게 뜬 오로라는 아니었지만, 저 멀리서 무지개처럼 나타나 호수에 비친 모습까지 보여준 게 그저 감사하기만 합니다. 시시때때로 보이는 오로라 덕에 단 한장도 같은 사진이 없습니다.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감상을 사진으로 보여드립니다.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게 부끄럽네요.

희미해졌다 밝아졌다 하며 하룻 밤을 설레게 만든 나의 첫 오로라와의 만남

 마지막 날까지 사람보다 동물들을 더 많이 만난 얀네의 집에서 이제 다시 헬싱키로 돌아기기 위해 버스시간에 맞춰 짐을 싸고 마중을 나온 얀네를 만났습니다. 괜히 집 앞에 있던 큰 나무에게 또 보자고 한마디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면서 얀네는 어젯밤에 개 짖는 소리를 못 들었냐고 물어봤습니다. 저도 언뜻 들은 것 같았고 얀네는 그게 엘크(말코 손바닥 사슴)를 잡는 소리였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차를 타고 가면서 엘크가 핀란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식량이고 한 마리에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나오는지, 아마 네가 서면 엘크 배가 네 머리에 닿을 거라고 자랑했습니다. 제가 순록을 본 얘기를 하니, 그건 엘크가 아니라고 마주쳤다면 쉽게 돌아오진 못했을 거라고 사진과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들어보니 얀네의 집 근방은 다들 엘크 사냥을 하는 모양이더군요.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정류장에 데려다준 얀네는 다음번엔 3월에 꼭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해는 충분히 짧아 오로라를 볼 수 있고 눈도 아직 있으며, 호숫가에서 자신과 빙하 낚시를 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3월'이 여행으로 시간을 내기에 적절한 시기는 아니지만 꼭 그때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다른 얀네의 단골처럼 가족을 꾸려 함께 핀란드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마지막으로 얀네는 제 옷을 쓱 보더니 꼭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서 흔들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검은색 패딩이라 버스가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고, 본인은 꼭 빛이 반사되는 재질의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하면서요.


끝까지 모든 것을 잡아먹는 어둠이 내린 핀란드였습니다.

너무나 다른 매력의 비사투파의 낮과 밤


이전 09화 우리 집에 친구가 놀러 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