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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Dec 30. 2018

NICE TO MEET YOU

니스 투 밋 유

 당신을 만나서 참 반갑습니다. 니스를 가기로 결심을 한 것은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서 고등학교 일 학년이던 때, 현장학습으로 갔던 해운대 레디움 미술관에서 니스파 화가들의 작품을 봤을 때였습니다. 사실 무슨 작품이 있었는지 그것이 아름다웠는지에 대한 기억보다 도대체 어떤 장소이길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게 할까?라는 의문과 미술관 카탈로그에 적힌 프랑스인들의 휴양지로서 니스의 묘사에 니스를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상상 속의 니스는 휴양지 하면 떠오르는 태평양의 섬나라들이나 혹은 부산이나 동해안처럼 예쁜 해변이 펼쳐져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누워 햇볕을 즐기고 비치발리볼이나 해수욕을 하는 이미지였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었던 상상이었습니다.

 우선은 니스에 머무르는 3일 중 첫 하루를 제외하고는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유럽에도 꽤 있었겠다 어지간하면 그냥 맞고 다니고 심지어 파리에서 눈비가 내려도 맞고 다녔는데, 아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호텔 리셉션에게 우산을 빌릴 수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본인 우산이라도 빌려줄 것처럼 두리번거리던 리셉션은 본인도 출근할 때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다고 미안해했습니다. 아마 본인 우산을 실제로 빌려줬더라면 저도 거절했을 것 같아서, 근처에 싸게 우산을 파는 곳이 있냐고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막시 바자르라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덕분에 모노 프릭스에서 15유로짜리 우산을 살 걱정을 덜었습니다.(막시 바자르에서는 4유로에 우산을 구했습니다.)


 다행히도 첫날은 날씨가 무척이나 좋아서 바다 구경을 실컷 했습니다. 반은 아니었다는 건 모래사장이 아닌 자갈밭으로 되어있는 해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갈밭 모래사장 가리며 쉬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책을 읽으며 쉬는 사람들 파도와 노을을 구경하는 사람들, 종종 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이나 근처 도로에서 보드를 타는 사람도 있었고 날씨가 좋은 여름이었다면 해수욕도 일광욕도 하겠지요. 하지만 '바다'하면 '여름'을 떠올리기엔 사시사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자라서 저에겐 겨울바다가 오히려 더 익숙합니다. 그래서 니스에서도 맨발로 걷다가 파도에 바지를 적시고 자갈밭에 옷을 말리며 누워있었습니다. 올해 초 겨울에도 말라가에서 정확히 똑같은 짓을 했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서 니스에 도착해서 바지를 적실 때까지 채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단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때 다양한 종류의 걱정이 참 많았는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워서 그런 걱정들이 들 때마다 파도소리가 몰아쳐 걱정이란 걱정은 하지를 못하게 했던 것만 기억이 납니다. 


 도로가에는 파란색 벤치가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중년층 부부가 그곳에 오래 담배를 피우며 앉아있기도 했고, 밤에는 와인이나 샴페인 병을 든 젊은이 여러 명이 앉아 크게 떠들다 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쪽에서 내려온 비눗방울을 보고 슬슬 노을을 좀 더 높은 곳에서 구경할 겸 일어나 캐슬 힐 쪽으로 걸어갔고 이미 해는 많이 내려온 터라 니스 바닷가 쪽 상점들과 절벽은 더없이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놓칠 수 없어서 지나가던 부부에게 사진을 부탁드리기도 하고 #I LOVE NICE라고 적힌 랜드마크 앞에서 수많은 관광객들 중에서 사진을 부탁드리기도 했습니다. 역시나 전 세계인의 사진 취향은 너무 달라서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사진도 얼굴만 잔뜩 나와서 I LOVE NICE인지 I L NI인지 구분이 안 가는 사진도 저는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종종 찍어준 사진에 무조건 좋다고 하기보다 다시 찍어달라고 할 수 있는 뻔뻔함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조금 아쉽네요. 


 둘째 날엔 모나코를 다녀왔는데, 모나코 행 100번 버스를 찾으러 가는 길에 저를 처음 니스로 오게 만든 니스파 화가 중 한 명인 패트릭 모야의 작품을 우연히 벽화로 보았습니다. 한눈에 봐도 모야 그의 자화상을 캐릭터로 담은 그림은 니스에 오고도 그 이유를 잊고 있던 참에 다시 상기시켜주는 그림이었습니다. 사실 니스에 와서도 첫 문단의 질문에 답은 찾지 못했지만, 애초에 니스와 니스파 화풍은 연관이 없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대신 오후에 샤갈 미술관이 닫기 한 시간 전에 들어가 샤갈의 종교적 작품들을 둘러보며 '이런 미술관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게 예기치 못한 수확이었습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호텔(사실은 오래된 호텔을 개조한 호스텔이라 4인실 방이었습니다.) 방을 함께 썼던 제리 할아버지와의 주된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왠지 제리 할아버지도 바다 구경을 하러 멀리 오신 것 같았는데, 계속 비가 내리니 아쉬운 눈치였습니다. 밤바다를 보겠다고 와인을 챙겨 나갔다가 십 분만에 돌아와서 제리 할아버지께 비가 온다고 했고, 세찬 비냐는 물음엔 일기예보가 곧 그럴 거라고 했다고 답했습니다. 실제로 그날 밤엔 천둥번개가 쳤고 할아버지는 라디오를 틀어두신 채로 잠에 드셨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억양을 가지고 계셨는데 Lovely~라고 하시는 게 자주 쓰시는 감탄사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생명과학을 전공한다고 말했을 때 Lovely라고 하신 분은 여태껏 그분뿐이셨거든요.


 니스에서 일출을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기회는 마지막 날 밖에 없을 것 같아 아침 일곱 시부터 온갖 소음을 내며(조용히 하려고 노력했으나 워낙 고요해서) 4인실 방을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그 파란색 의자에 앉아서 반바지 위에 청바지를 입고 바람막이 위에 코트를 입은 해괴한 패션으로 비 온 후 추위를 이겨내려 노력했습니다. 수평선과 구름 사이에 살짝 틈이 있어서 저 사이로 해가 뜨면 예쁠 수도 있겠다고 내심 기대를 했는데, 해가 뜨는 방향엔 그 틈 조차 허락하지 않아서 일출을 보지 못한 채 돌아왔습니다. 공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아홉 시, 호텔 조식(이라곤 하지만 빵과 커피, 버터와 시리얼이 다 인)을 먹으러 부엌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요한 씨를 만났는데 처음엔 존이라고 인사했다가 제가 한국인인걸 알게 되자 신요한이라고 다시 본인을 소개했습니다. 저 역시 영어 이름에서 본명으로 소개를 고쳤습니다. 재미교포인 요한 씨와는 니스에 오게 된 얘기를 하다가 이곳에 오기 전 세네갈에서 봉사활동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저는 탄자니아에서 여름에 봉사활동을 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또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서 비슷한 일을 했다는 걸 서로 신기해하며 요한 씨는 세네갈에서 불어를 배워왔는데, 프랑스와 무엇이 다른지 자꾸 프랑스인들이 이상하게 여긴다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끝까지 듣느라 공항버스를 한 대 놓치고 다음 버스는 그냥 가게 두면 안될 것 같아 자리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다시 구름이 개어서 마지막으로 화창한 니스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니스 공항에서 덴마크로 돌아가기 전, 비행기 계단 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NICE TO MEET YOU.

니스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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