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으로 가는 길
아스타나는 카자흐스탄의 수도로 알마티에서 수도를 옮긴 지 20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수도입니다. 그리고 저는 덴마크로 교환학생을 가는 길에 인천공항에서 수하물 수수료며 덴마크 비자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을 부랴부랴 해결하고 아스타나 항공에 몸을 실었습니다. 녹초가 된 몸을 비행기에 눕히자마자 아스타나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브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2년 만에 러시아에서 배웠던 키릴 문자 읽는 법을 되살려 내야 했습니다.
"P는 R로 읽고, C는 S로..."
정확한 방법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터득했던 방법을 되살리고 "이즈비니쩨Извините(실례합니다)"와 "그졔где(어디에?)"를 기억해 낸 덕분에 카자흐스탄 도착 15분 만에 ATM에서 돈을 뽑고 공항 앞에서 사진을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를 뽑아야 하나 열심히 고민하다 버스비가 90 텡게라는 말을 듣고(실제로 제가 갔을 때는 180 텡게였습니다.) 5000 텡게(약 만 오천 원) 면 충분하겠지 싶어 5000 텡게로 1박 카자흐스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풍족한 두 끼와 맥주 한 병 심지어 카잔 초콜릿까지 사고도 200 텡게가 남았습니다!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를 찾기 위해 샤라이시크 거리를 찾는데 바보 같게도 구글 지도의 오프라인 저장을 깜빡한 것입니다. 바이쩨렉 타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버거킹 맞은편 네모난 건물이었다는 것만 기억해 버스를 타고 창밖을 주시했습니다. 정류장에서 찍어둔 노선도랑 도로랑 비교해 가며 바이쩨렉이 보일 때쯤 맞춰 무작정 버스를 내렸습니다. 여행가방을 질질 끌면서 바이쩨렉이 있는 주변 블록을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버거킹은 보이지 않고 모든 건물이 다 네모 반듯하게 생겨서 결국 물어물어 숙소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과 발걸음 속에서도 길을 물어볼 때나 사진을 부탁하거나 받기도 할 때 상냥한 미소가 드러났습니다. 숙소는 가운데 놀이터가 있고 사방이 한 건물로 둘러싸인 신기한 아파트였습니다. 세 세대쯤 되어 보이는 숙소 주인 대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덕분에 로비에서 조금 기다리고서야 방을 안내받을 수 있었습니다.
짐을 풀고 첫날 저녁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카자흐스탄 음식은 어떨지 아니 길거리에서 카잔 음식점을 찾을 수는 있을지도 모르는 채로 거리를 돌아다니다 이제 막 오픈 준비를 하는 듯 한 슈퍼에 들러 물을 한 병 샀습니다. "가게를 이제 막 열었나 봐요?"라고 영어로 질문을 했는데 영어로 답변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우연히 동네에서 영어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자 슈퍼를 나서는 발걸음을 돌려 저녁을 해결할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했습니다.
"음 저쪽으로 가면 이탈리아 식당이 있고 피자를 파는데 그렇게 맛있진 않아 또.."
"그런 거 말고 카자흐스탄 음식은 없어?"
"오 카자흐스탄 음식이 먹고 싶어?? 그거라면 дастарқан(다스타르칸)을 찾아가 봐! 왼쪽에 빨간 간판으로 되어있어."
카자흐스탄 음식이 먹고 싶다는 말에 화색이 도는 표정에 그들의 음식에 얼마나 애착이 있는지가 보였던 순간입니다. 그렇게 찾아간 음식점은 뷔페식으로 음식이 진열되어 있었고 점원에게 네가 골라달라는 뜻을 담은 온갖 바디랭귀지를 다 동원해서야 소고기, 감자 그리고 크림이 겹겹이 쌓인 메뉴와 계란 프라이가 올라간 떡갈비 같은 고기 그리고 따듯한 차 한잔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질까 봐 저녁만 먹고 들어가려 했는데 여름에 한국보다 고위도로 가서 그런지 해가 늦게 떨어져 아까 지나쳤던 바이쩨렉 타워를 좀 더 자세히 보려고 공원에 들어갔습니다. 해가 높이 떠있을 때는 태양빛이 금색 구에 비쳐 빛이 났고, 노을이 질 때는 그 뒤에 있는 칸 샤티르 쇼핑센터와 대통령궁을 비춰 주었고 드디어 밤이 되자 스스로 하얀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바이쩨렉도 굉장히 특이하게 생긴 타워지만 그 뒤에 있는 다양한 고층빌딩들이 아스타나를 더 신기한 곳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층빌딩의 끝에 중국식 정자가 놓인듯한 건물, 아스타나의 정부 건물은 건물이 도로 위에 있는 터널처럼 지어져 있었고 원기둥이며 각뿔대까지 중학교 수학 교과서에서 보던 도형들이 건물이 되어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아스타나에서의 경유의 첫날밤이었습니다.
다음날은 오후 세시에 비행기 보딩이 있어 서둘러 관광을 마치려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심 강을 건너 평화와 화해의 궁전이라는 곳에 당도했습니다. 그 이름에서 전 지구적 규모가 느껴지듯이 건물 자체도 생각보다 웅장한 유리 피라미드였습니다. 아침이라 한산한데 침엽수로 공원까지 광활히 조성되어 있어서 스산한 느낌이 살짝 감돌았지만 아스타나의 주 시가지를 둘러보기엔 더없이 좋은 위치였습니다. 앞으로 쭉 뻗은 길에 차곡차곡 놓인 고층건물들과 대통령궁은 새로이 지어진 도시 특유의 공허함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스함이 느껴졌습니다. 아쉽게도 건물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햇빛에 비친 꼭대기 층의 비둘기 조형물은 볼 수 있었습니다. 몰랐었는데 피라미드 뒤쪽으로 카자흐 엘리 기념탑과 독립광장이 있어 그곳을 지나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큰 모스크인 하즈렛 술탄 모스크로 향했습니다.
사실 평화와 화해의 궁전 공원에 있을 때부터 멀찍이서 모스크가 어서 오라고 지켜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어디서든 잘 보이도록 달밤의 달같이 말입니다. 아마 모스크든 성당이든 사원을 크게 짓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처음 모스크가 있는 블록에 도착해 광각렌즈로 사진을 몇 장 찍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상한 큰 홀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말로 쓰인 간판들과 기념품 매대 그리고 연회장이 있어서 마치 재래시장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원래 이런 곳인가 생각하면서 무작정 화살표를 따라 들어갔더니 대중목욕탕 같은 공간이 나왔습니다. 예전에 모스크에 예배를 드린 기억을 되살리면 아마 기도 전에 신체부위를 씻는 용도로 사용되는 곳일 텐데 그때 아 잘못 들어왔구나 생각이 들어 모스크 밖을 일단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제야 반대편으로 돌아가니 (이마저도 꽤 걸어야 했습니다.) 돔을 가릴정도로 크게 장식되어있는 문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모스크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방문했던 모스크들은 카펫 감촉을 맨발로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좋았습니다. 답답함 없이 높이 솟아있는 돔에 오직 그들의 문장으로만 장식을 해둔 벽은 화려하면서도 덧없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넓은 예배당에는 전통모자를 쓴 할아버지와 손자로 보이는 두 사람만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 손자는 할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빨리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스타나에 오기 전에 이 건물을 인터넷에서 보고 꽤나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여기 와서는 워낙 알 수 없는 건축물들 덕분에 '음 이런 건물은 있을 법 하지'싶었던 곳이 바로 칸 샤티르입니다. 마치 거대한 게르나 천막 또는 우주선의 모양을 하고 있는 이 건물은 아스타나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쇼핑의 성지인 곳입니다. 넓은 건물 안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있고 쇼핑센터 구경을 나온 가족들도 보였습니다. 그중 단연 눈에 띈 것은 천막 기둥 같았던 건물의 기둥이 알고 보니 자이로드롭이었던 점입니다. 실제로 그 자이로드롭이 운행하는 것을 그날 보지는 못했지만 층층이 올라가며 푸드코트, 백화점 그리고 놀이공원과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는 이곳이 진짜 아스타나 시민들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도 이곳에서 (한국 떠나자마자 중식이 너무 먹고 싶었지만 중국집을 지나치고)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우크라이나식 식당에서 얇은 소고기가 들어간 육전 같은 계란말이와 깔끔했던 브로스(Broth)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칸 샤티르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오자 다양한 건물들이 놓인 대로에
"I ♡ ASTANA"
조형물이 보였습니다. 아직 내가 이해하기엔 벅찬 그곳을 배경으로 칸 샤티르를 뛰어놀던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사진을 부탁하고 그 길 속을 다시 걸어 처음 왔던 바이쩨렉에서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습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이곳에서 이방인 같으면서도 이방인 같지 않음을 느낀 이상한 경유가 끝났고 저는 유럽행 비행기에 다시 올라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