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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Apr 20. 2018

강릉, 여행이 요리라면

혼자 훌쩍 떠나버린 

 나는 지금 강릉항 근처에 안목역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테이블 4개 남짓의 작은 카페에 와있다. 바다가 보이는 쪽에 방을 잡아두었고 옆에 방금 내린 라떼 한잔이 있어서 모든 게 완벽한데 하나 문제라면 아직 중간고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cafe 안목역

 아 그전에 제목부터 설명하고 싶은데, 전에 다른 작가님의 브런치 글을 읽다가 여행작가에게 여행은 요리사에게 재료와 같다고 설명하신 글을 보았다. 글의 요지는 여행을 다니며 그때의 느낌을 바로바로 싱싱하게 전달할수도 있고, 오래오래 두고 숙성시켜 여행기의 맛을 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 말에 십분 공감했지만, 본의 아니게 이제껏 쓴 여행기는 모두 작년 혹은 늦어도 올해 초에 다녀온 기록들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여행지에서 글을 쓰는 요리를 해보고 싶었고 그렇게 중간고사 한 과목을 앞둔 오늘 강릉으로 올라와 버린 것이다.

 계획은 이러했다. 유성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강릉을 간 다음 바로 횡계로 가는 버스를 타고선 대관령 양떼목장에 올라 드넓은 잔디밭에 뛰노는 양들을 구경하다 초당동에 가서 순두부로 저녁을 먹고 강릉항 근처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잔 다음 안목해변과 강문해변 그리고 경포해변을 아침에 산책하고 대전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사실 시험기간이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이 없었다는 건 핑계고 숙소를 예약하기 직전까지 과연 강릉에 와도 될까 의심스러웠다. 두 번째 과목의 중간고사가 끝나고서야 마음에 여유가 생겨 숙소를 잡고 오늘 아침 유성에서 강릉으로 가는 아침 10시 20분 버스에 올랐다. 교통수단에만 앉으면 잠에 드는 내 능력 덕분에 강릉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억이 없다.. 아무튼 두시가 다 되어서 강릉에 도착했는데, 마침 횡계로 가는 두시 버스가 있어 바로 몸을 실었다. 


아직 오분 남았다↗ 빨리↗ 다녀와라↘
안↗전띠↘ 착용하세요↗
강릉에서 횡계가는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수시로 있어 서두를 필요가 없다.

 횡계로 가는 버스에서 처음 들은 강원도 말씨였다. (화살표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릉 시민 분들의 수정이 필요합니다.) 듣자마자 "우와.."했다. 나도 지방 사람인지라 지역감정 혹은 지방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분이 아니라 처음 듣는 말씨여서 놀란 것이다. 약간 북한 발음 같기도 하고 옛 서울말 느낌도 나 확실히 남쪽 지방과는 말투가 다른 게 듣기만 해도 퍽 내가 외지인이 된 느낌이 난다. 한국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을진 몰랐는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산에 그림자를 얹을 크기란 이런 것

 양떼목장을 올라가는 길에 군부대가 보였다. 딱 보자마자 강원도구나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현재 근방에 복무 중인 친구들이 생각이나 방금까지의 기분과 사뭇 온도차를 느꼈다. 대관령 어디서나 보일 법한 굉장히 큰 풍력발전기가 있었는데 풍력발전기의 그림자가 산 능선에 걸쳤다. 저렇게 크면 저렇게 큰 산에도 자취를 남길 수 있구나 생각했다. 


아직 봄은 덜 왔지만, 일찍이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양떼목장 입장권을 끊었는데, 매표소 직원분이 아직 풀이 덜 자라 양들이 방목되어 있진 않다고 말해주셨다. 아 사진에서 본 그런 양들이 풀밭에서 구르고 뛰노는 모습은 못 보는 것인가, 왜? 풀이 저렇게나 많이 보이는데..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온 김에 뒤는 없다 싶어 목장을 올랐다. 목장 입구에서 안내도를 보는 순간 지브롤터의 악몽이 떠올랐는데, 결국 역시나 나는 목장의 모든 산책로를 다 돌고 내려왔다고 한다. 부드러운 언덕이 연달아 있어 예전에 간 진악산과 고도는 비슷한데 훨씬 수월했다. (그렇지만 정상으로 가는 곳은 다소 경사가 있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매표소 직원분 말마따나 아직 봄이 덜 온 게 살짝씩 보였다. 잎 나지 않은 자작나무, 듬성듬성 빈 곳이 드러나 부끄러운 언덕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벌써부터 자기들만의 봄이 한창인 커플들이 보였다. 사진 찍기에 열심히셨고 나도 혼자 사진 찍기에 열심히었다.

  올라가면서 길게 말총머리를 하신 아저씨가 넓은 챙모자를 쓰고 올라가셨는데 그곳에 있던 아이들이 카우보이 아저씨라고 불러댔다. 아저씨는 사람 좋게 아이들 부름에 허허 응답해주시고 갈길을 가셨다. 멋있으셔...


축사 앞에서 만난 친구들, 양한테는 관심도 없는 냥이와 양치기(?) 개

건초주기 체험장으로 가면 누렁이가 지키는 양 축사가 있고 주위를 유유자적 맴도는 고양이가 있다. 양치기 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여기 고양이와 강아지는 사이가 딱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 티켓을 드리면 양에게 먹이로 줄 수 있는 건초를 한 바구니 나눠주는데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면 양들이 울타리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줄줄이 따라온다. 뭐지 얘네 아까 지나갈 때랑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아..

제발 건초 없이도 그렇게 봐주면 안되겠니..?

그나저나 양한테 먹이를 주면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첫 째, 양과 같은 반추동물은 앞니와 송곳니가 없어 먹이를 주어도 손이 물릴 리가 없다. 사육사 분께서 설명해 주셨고 덕분에 먹이를 주면서 양이 입술로 내 손바닥을 열심히 우물우물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둘째, 되새김질을 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 쉬지 않고 우물우물한다. 앉아서도 서서도 친구 등에 기대서도 눈을 감고도 입은 항상 쉬지 않고 우물우물..
셋째, 양의 눈동자는 일(一) 자로 생겼다. 얘네도 어두워지면 홍채가 커져 동그래지긴 하던데 그래도 일자로 가느다란 눈이 양이 귀엽다는 이미지 내지는 졸려 보인다는 인상에 한 몫하는 게 아닐까?
우물우물

마지막으로 새끼 양들은 큰 양들에게 밀쳐져 먹이를 많이 먹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전문적인 사육사들이 따로 챙겨줄 테고 아주 어린양들은 따로 길러지는 듯했지만 먹이 때문에 서로 밀치는 모습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눈앞에서 내 손위에서 입술을 우물거리며 먹이를 먹는 양을 보는 게 꽤나 이쁘고 귀엽긴 했다. 손바닥이 간지럽혀지는 게 딱 기분이 좋을 정도랄까?

홀리..

 그 옆에는 행복한 양들이 쉬는 집이라는 이름의 축사가 있었는데, 그곳의 양들은 뭔가 느긋하고 나른해 보였다. 창가로 비치는 햇살 때문에 그 아래 몇몇 양들은 마치 어린이 성경책에 나올 듯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갓 털이 밀린 듯 앙상해 보였는데 머리만은 복슬복슬하였다. 머리털을 만져 보았는데, '헉 이거 양털 카펫이랑 완전 느낌이 똑같잖아.'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마침 내려갈 때쯤 어느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아이들이 양들에게 먹이주기를 시작했다. 무섭다고 하는 아이 건초 주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 건초로 친구랑 장난을 치는 아이까지 그새 건초 체험장은 복작복작해졌고 나는 그렇게 대관령을 내려왔다.



대관령에서 다음 넘어간 강릉 중앙 시장에서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서 초당순두부마을은 내일 아침으로 미뤄야 했다. 남은 시간 동안 어딜 갈까 생각하다 내내 한 끼도 먹지 못한 배를 잡고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예전에 평창올림픽 자원봉사자 교육으로 강릉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중앙시장에서 옹심이를 먹었었다. 그리고 오늘 지나가다 그 집을 마주쳤는데 이렇게 먼 타지에 익숙한 장소가 있다는 게 반가웠다. 무작정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저번에 왔을 때의 시장과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땐 모든 닭강정 집에 줄이 늘어서 있었고 젊은 손님들도 많이 돌아다녔는데 오늘은 학기 중이라 그런지 시장은 조금 한산한 느낌이었다. 닭강정과 분식으로 여행객들을 붙잡는 시장이 아닌 수산물 가게, 옛 가구점, 약초 내지는 채소를 늘어둔 좌판이 더 눈에 들어오는 시장이었다. 

 정겨운 모습도 좋지만 젊은 층이 없는 요맘때의 시장을 보니 많은 생각이 오갔다. 시장이란 공간도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의 모습을 많이 바꿔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지나가다 맘에 드는 고추튀김이 보여 고추튀김, 깻잎튀김, 고구마튀김과 산적 꼬지를 포장했고 닭강정을 한 컵 사서 시장 어귀에서 먹다가 바다를 보며 맥주를 마시며 먹고 싶어져서 여기 안목해변으로 오는 버스를 다시 탔다.


중앙시장 튀김이랑 맥주 한 캔 사두고 저녁

 그렇게 안목해변을 걸어 숙소에 짐을 두고 모래사장에 앉아 노래를 틀어두고 실컷 궁상을 떨었다. 아까 먹던 튀김을 마저 먹고 사진을 찍다가 해가 지는 걸 구경했다. 강릉의 해변가를 걷다 보면 과하지 않게 남아있는 올림픽의 흔적이 이곳저곳 남아있다. 수호랑이랑 반다비 동상이 있는데서 함께 셀피도 찍고 아까 숙소로 가는 길에 눈에 들었던 카페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안목 해변


이것이 백합인가?

 안목역이란 이름을 가진 카페 옆엔 꽃 화분이 세워져 있는 단독주택이 있는데, 아까 지나가는 길에 할머니 두 분이 이 꼿이 백합일까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계셨다. 카페 노래가 꺼졌고 아까 옆에 앉아 책을 읽던 손님이 나가셨으니 나도 나가서 그 꽃이 과연 백합이었을지 확인하러 가야겠다. 그리고 내일은 아침으로 초당 순두부를 먹을 테야. 그러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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