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모로코에서
솔직히 말하면 스페인에서의 저는 완전히 지쳐있었습니다. 여행이 어느 정도 중반에 접어든 시점이었고, 바르셀로나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하면서 온갖 신경이 곤두선 채로 여행을 하다 보니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 편으론, 바르셀로나에서 말라가를 거쳐 곧바로 모로코를 가야 하는 일정인데 그래도 아프리카보다 유럽이 안전하지 않을까? 모로코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엄습했었습니다.
그런 걱정을 한껏 안고 알헤시라스에서 출발한 배는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탕헤르에 당도했습니다. 아침 기차를 타고 마라케시에 그 날 도착할 작정이어서 새벽 4시 배를 타고 한 밤중에 아프리카에 땅을 딛다니 '내가 드디어 아프리카를 와보는구나!'라는 성취감과 함께 어두운 항구의 알 수 없는 아랍어들이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버스 첫차가 여섯 시라는 소리에 택시정류장에 달려가 택시 안에서 주무시던 기사님을 깨워 기차역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친절하게 버스 첫차 시각과 택시정류장 위치까지 알려주셨던 것인데 저는 그때 왜 그리도 겁을 먹었는지. 그렇게 6인승 그랑 택시를 저랑 저와 동행한 형 둘이서 타고 항구를 떠났습니다.
읽을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알 수 있어요. 제 기차가 언제 떠나려는 지요.
티켓을 사고 잔돈으로 백 디르함을 받았는데, 뒷면이 낙타를 타고 있는 유목민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정말 조만간 나도 이렇게 낙타를 타고 사막에 있겠구나 하고 엄청 설렜던 순간입니다.
고등학교 때 사두고 채 끝까지 읽지 못한 나생문을 들고 왔습니다. 이번에 기차를 타면 오랫동안 지루할 테니 책을 한 권 가져가자라는 다짐에 나생문은 영국에서부터 여행 내내 지루함을 달래 주기도 하면서, 일기장이자 스케치북이 되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보통은 탕헤르로 입국해 마라케시를 갈 때 아홉 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야간열차를 타고 갑니다. 하지만 저희는 특이하게도 탕헤르에서 시디 카쳄이라는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마라케시 까지 갑니다. 모로코 열차의 2등석은 8명 남짓이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칸으로 되어 있는데, 저희는 운 좋겠도 처음엔 빈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중에 언젠가 영상을 만들 때 쓸만한 영상도 찍어보고 책도 읽으며 졸다가 시디 카쳄에 도착했습니다. 모로코 기차역에는 RESTAURAIL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역마다 식당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후에 쉐프샤우엔에 가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아마 레스토랑과 레일을 합친 이름이겠죠?) 이 곳에서 chicken-sandwhich와 meet-sandwhich를 시켜 나눠먹고 새로운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사실 치즈 샌드위치도 있었지만 몇 끼니째 제대로 먹은 게 없어 고기가 시급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기차에 올라 아까처럼 빈칸이 있나 한 바퀴를 돌았지만 아쉽게도 빈칸은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반가운 목소리로 우릴 부르는 "Are you Korean?"이라는 문장이 들렸습니다. 이 목소리가 반가웠던 이유는 그간 '치노? 하포네즈?' (스페인어로 중국인? 일본인? 이냐는 뜻)를 들은 후에야 '아아~ 꼬레아노'를 들을 수 있었는데, 처음부터 우릴 한국인으로 알아봐 주는 게 너무 반가워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메디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불어를 유창하게 하고 영어를 (잘 하던데) 못해서 연신 미안하다고 하며 본인이 빅뱅 팬이라 바로 한국인을 알아봤다는 이 곱슬머리의 모로코 친구는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어 문장으로 "저는 오타쿠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덕분에 잔뜩 사람에 대해 긴장해 있던 마음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서로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한 장씩 남기고 그렇게 얘기를 하며 '빅뱅 노래를 듣지만 한국어가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노래는 좋다. 일본 애니메이션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제가 읽고 있는 책이 신기했는지 한국어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얘기를 했습니다.
메디는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는데, 본인은 무슨무슨 역에서 내린다고 얘기를 했지만 도저히 아랍어 단어는 듣고도 구분이 가지 않아 '아아~' 하며 한 귀로 흘렸더니 매번 기차가 설 때마다 '이번에 메디 내리려나? 잘 가라는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론 내리면서
"Find me on facebook and message to me"
" OK I'll find you on facebook"
이렇게 세계 청년다운 인사로 헤어지긴 했습니다.
한글을 신기해하는 메디를 위해서 제 예전 동아리 명함에 이름을 한국어로 써주고 반대로 제 이름을 (정확히는 다니엘이라는 영어 이름을) 아랍어로 받아왔습니다. 꼭 한 번은 아랍어로 이름을 쓰는 법을 알고 싶었는데, 아무리 번역기를 돌려도 찾기 힘들더라고요. 그 와중에 메디는 유심히 제 명함을 보더니
"오! 너 디자이너구나? 나한테 좋은 아이디어들이 있는데 나중에 같이 한번 멋진 걸 만들어보자."
라고 얘길 합니다. 차마 "나 진짜 디자이너는 아니고, 더더욱 지금은 디자인 안 하고 있어."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볼게"라는 두루뭉술한 답을 했습니다.
나중에 사막으로 가는 중에 페이스북 메시지를 메디와 주고받았는데, 사막에 가봤냐는 제 물음에 따진을 꼭 먹으라는 엉뚱한 답이 왔지만 그래도 기차에 있는 동안 덕분에 첫 모로칸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메디와 대화를 하다가도 차창을 보기도 하고 나생문도 마저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산했던 칸이 어느새 모로코 가족으로 북적북적해졌습니다. 귀여운 아이 셋과 엄마 그리고 할머니가 함께 탄 가족이었는데, 자매인지 남매인지는 막내가 너무 어려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귀여운 막내는 엄마 품에 안겼다가 누나들 (언니들 일지도 모르지만) 품에 안겼다가 하며 또 가족뿐 아니라 메디와 우리의 예뻐함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거의 금발이라 할 만큼 옅은 갈색에 곱슬머리였는데, 눈동자가 살짝 푸른색을 뗬습니다. 또, 아이들 머리가 원래 이렇게 컸었나 싶을 만큼 볼이랑 이마까지 빵빵해서 입술이 꼭 삐죽 튀어나온 모습이 무척이나 예뻤습니다.
그 예쁜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행여나 아이 엄마가 싫어할까 사진 대신 나생문 한쪽에 그림으로 그려왔습니다. 물론 제 그림실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아이가 가만히 있질 않아 채 귀여움을 다 담진 못했지만요.
세상모르고 자다 깨다 하는 막내와 달리 딸아이 두 명은 서로 장난을 치다가도 (그러다 한번 둘째가 혼이 났다지요.) 저와 눈이 마주치면 살짝 겁을 먹은 표정을 짓습니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마 동양인 남자 두 명이 모로코 기차 칸 안에 들어있는 게 흔한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다 작은 아이가 엄마를 불러다가 '스미마셍 뭐라 뭐라' 얘길 합니다. 알고 보니 꼬마 아이들이 일본어를 배우는 중이었나 봅니다. 배운 일본어를 써보곤 싶은데, 자기 앞에 앉아있는 저 남자가 일본인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 엄마를 데려다 물어보라고 시킨 거지요. 미안하게도 제 일본어는 초밥 주문에만 특화되어 있어서 꼬마 아이 대답엔 곤니치와 오하요 정도밖에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또, 어머니께서 한국어랑 일본어랑 중국어랑 많이 다른지 물어보시길래 또 세 언어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가족 중에서 히잡은 엄마와 할머니만 쓰고 있었는데, 어린아이들도 틈틈이 꾸란을 꺼내 읽더군요. 아직 어려서 히잡을 쓰지 않은 것인지 이슬람교이지만 히잡을 쓰지 않는 것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모로코는 이슬람 국가들 중 가장 개방적인 나라 중 하나라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들이 많이 보입니다. 꼬마 아이들과 말은 통하지 않았어도 둘이서 그렇게 막내를 아끼는 모습이 좋아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예뻐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그렇게 기차는 마라케시에 도착했고, 세 아이를 가진 어머니께 여행을 잘 하라는 안부인사를 들은 후 우리는 일전의 긴장감이며 두려움을 다 떨쳐내고 기차에서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연히 만났던 사람들이 모두 제 여행의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사하라로 가는 일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