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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Sep 11. 2020

사랑은 호의와 어떻게 다른가

영화 <클라우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짜 선물

예전에는 줄곧 ‘드가’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유를 찾아 도전하는 앙리에게만 몰입되어 있어 그랬는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감옥을 함께 탈출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살아가며 <빠삐용>을 다시 볼 때면 드가의 마음으로 점점 고개가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누구나 호기롭게 떠날 수는 있어도 대부분 그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떠난 후에야 알게 된다. 달리는 지옥에서 뛰어내려야 할 ‘당위’는 차고 넘치고 몸 담아야 할 생의 가치는 늘 다른 곳에 있지만, 그러한 ‘내 마음의 강제’는 쉽게 삶의 족쇄가 되고 만다. 다른 삶을 살라고 호기롭게 조언하는 책과 영화는 많아도, 정작 내일 아침 눈을 뜨고 걸어가는 길에는 늘 나 혼자다. 그렇게 내가 ‘드가’가 아닌 ‘앙리’의 자유를 누리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래서일까. 이 대사 한 마디가 가족용 애니메이션 한 편을 새롭게 보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보트에서 내리는 건 쉬워. 정말 어려운 건…”     


안락이 보장된 곳으로 차마 떠나지 못한 청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에게 넋두리하듯 말한다. 내게 소중한 것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나의 말과 행동이 통하기나 할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는 차마 선착장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뜻 모를 말을 하며 웃는 아이는 바라는 것 없이 그저 가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진짜 삶의 시작은 행동하기로 결정한 지금부터라는 걸 마치 아는 것처럼,     



‘인생을 낭비한’ 벌로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섬마을에 우편배달부로 가게 된 제스퍼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1년 이내에 편지 6000통을 처리하라는 미션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 싸우기에 여념이 없고, 아이들은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다.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 목수 클라우스를 만나고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가 만들어 둔 장난감을 아이들에게 몰래 선물하는 일을 시작한다. 우연히 편지를 쓰면 클라우스의 선물을 받게 된다는 걸 알게 된 아이들은 하나둘씩 우체국을 찾아오고, 마을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원래의 무료하지만 부유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목표량을 채우다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제스퍼. 부인을 잃고 쓸쓸하게 살다 자신의 아이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던 장난감을 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 클라우스. 척박한 현실에 꿈을 접었다가 글을 배우려는 아이들 때문에 모아둔 돈마저 내어놓으며 교사의 삶을 되찾는 엘바. “선한 행동은 또 다른 선한 행동을 낳는다”는 손쉬운 결말로 끝나도 좋을 영화는 “이 마을을 세운 건 분노와 미움”이라며 갈등을 고조시키는 크럼과 엘림보 가문의 방해를 클라이맥스로 던져놓는다.     


이 영화에는 그저 평범한 가족 오락영화로 머물지 않게 하는 몇 개의 장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호의(선한 행동)에 머물지 않고, 사랑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     


클라우스와 제스퍼가 함께 대패질을 하는 모습은 말이 행동으로, 선택이 과정으로 변환되는 순간의 뜨거운 에너지를 품고 있다. 어렵사리 편지를 쓴 소수민족 아이 마르구를 위해 장난감이 필요하지만, 만들어두었던 장난감이 모두 떨어져 고민하던 제스퍼는 클라우스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만들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온 클라우스는 이를 거절하고 제스퍼는 할 수 없이 서툰 솜씨로 혼자 장난감을 만들다 잠든다. 이를 지켜보던 클라우스는 마음을 돌이켜 작업을 시작하고 둘의 대패질 소리는 마치 눈 내리는 소리처럼 작업실에 조용히 번진다. 사실 그때까지 클라우스는 쌓여있던 장난감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세상에 발을 다시 내민 것뿐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대패질을 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가야 할 방향과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호의가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사랑은 오히려 자신을 쓰다듬는 마음이다.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호의라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사랑이다. 아내의 상실이라는 상처에서 벗어나 그렇게 클라우스가 웃음을 얻는 순간이다.  


   

이 장면에서는 옛날 서양식 대패의 흔적을 구경할 수 있다. 앞뒤에 잡는 손잡이가 달린 서양식 대패는 몸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밀어내면서 나무의 표면을 다듬는 구조로 되어 있다. 별도의 손잡이가 없는 동양식 대패는 그와 반대로 자신의 몸 쪽으로 대패를 당기면서 표면을 다듬는다. 동양과 서양의 미묘한 차이를 볼 수 있다.(흔히 서양식 대패가 초보자도 쉽게 다룰 수 있고 힘이 덜 든다고 이야기하는데, 철물과 조절 장치를 갖춘 현대식 서양 대패를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기 때문에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클라우스 집 주변에 무수히 서있는 자작나무도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다.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 나뭇결이 촘촘하고 단단하며, 벌레도 잘 먹지 않아 오래가는 나무다. 자체 습도 조절도 잘하는 친환경 소재로 알려져 아이들을 위한 가구나 장난감의 소재로 많이 쓰인다. 클라우스가 만든 장난감이나 마르구에게 만들어준 썰매도 자작나무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결혼하다는 의미로 ‘화촉을 밝힌다’ 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때의 화(樺)가 바로 자작나무를 가리킨다. 클라우스와 아내의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다.     


앞서 이야기한 선착장 장면도 영화의 주제를 드러낸다. 보트를 떠나보내고 ‘고립’을 택한 제스퍼는 무엇인가를 위해 ‘애썼다’는 해명보다는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를 자책한다. 돌아가도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줄지, 혹은 받아줄지 알 수 없다. 내리기는 쉬워도 그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을 떼기는 너무나 힘든 것이 닥쳐오는 삶이다. 당위와 선의만으로 삶을 내맡길 수는 없다. 제스퍼는 그저 선착장을 떠나 닥쳐온 친구들의 위기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그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가상의 마을 스미어렌스버그(Smeerensburg)는 노르웨이 스발바르(Svalbard) 제도 암스테르담 섬에 존재하는 실제 마을 스미어렌버그(Smeerenburg)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곳은 17세기 초 번성했다 쇠퇴한 포경기지였다. 영화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고래 뼈가 이를 대신 말해준다. 고래 기름을 끓이던 솥과 마을의 흔적이 이제는 관광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일꾼들이 모두 떠나간 자리에 남은 사람들, 부(富)가 사라진 자리에는 분노와 미움만이 남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제스퍼가 마르구를 데려가 엘바의 교실에서 편지를 쓰게 하는 장면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에서 소통하는 사람으로 나아간 엘바를 만날 수 있다. 편지는 언어, 곧 소통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이해도 관심도 연대도 없다. 그리고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서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다. 내 말만 하고 귀를 닫아버리면 다른 언어일 뿐이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꿈을 되찾은 엘바였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 교실을 꾸미고 소통하는 ‘보람’까지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마르고를 마음을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스페인 영화이면서도 <클라우스>는 북방 소수민족의 언어를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마르구의 말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와 러시아 북부에 걸쳐 살고 있는 ‘사미(Sámi)족’의 언어다. 사미족은 순록 목축과 ‘눈(雪)’을 뜻하는 단어가 300개에 이를 정도로 풍성한 언어가 특징이다. 1999년부터 공식 소수인종 언어로 인정받았고, 사미의회는 1993년 설립돼 스웨덴 정부의 공식 지원을 받고 있다. 노르웨이와 핀란드에서도 사미족을 위한 전통문화와 언어 보존을 위한 행정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천진한 얼굴을 한 마르구지만 그의 속한 사미족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우생학의 여파로 열등 인종으로 몰린 민족은 불임시술을 강요받기도 했고, 사미족도 그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소수민족 인종연구를 위해 유골이 수집되고 무덤이 파헤쳐지기도 했다.(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124) 1992년 노르웨이 의회는 2월 6일을 ‘사미족의 날’로 지정해 순록 경주대회와 각종 공연, 공예품 시장 등이 열린다고 한다.      


출처: <Morning  Calm> 2019년 1월호.


영화에서 클라우스가 더 넓은 지역으로 선물을 전달하며 입게 되는 복장은 샤미족이 만들어준 전통의상을 닮았다. 마르구가 입은 강렬한 색상의 전통 의상은 ‘각티(Gákti)’라고 불린다. 각티는 순록 가죽과 털, 그리고 ‘바드말’이라 불리는 거친 모직으로 만드는데. 각티를 보면 착용자가 기혼인지 미혼인지, 어느 공동체 출신이고 어떤 사미족 방언을 구사하는지, 어느 가문 출신인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 수 있다고 한다. ‘각티’라는 말 역시 전통의상을 가리키는 북부 사미어인데, 북부 사미어가 가장 널리 쓰이다 보니 지금은 이 단어가 전 지역에서 통용된다고 한다.      


사랑은 상대방과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함께 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재(잠깐이든 오랜 시간이든)를 받아들이고,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묵묵히 해나며 교감하는 일이지 않을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애쓰는’ 마음은 아직 사랑이 아니다. 해피 엔딩에 대한 미련이 버려지는 순간에야 우리는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될지 모른다.      


<클라우스>는 산타클로스의 유래라는 포장을 하고 있지만, 아픔을 보듬는 우리의 시선만이 세상을 녹일 수 있으며, 결심보다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누구나 “다른 삶을 살겠어”라고 선택하기는 쉽다. 정말 어려운 건 그 다른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보트에서 내린 삶이 너무 힘들다고 절망하지는 말자. 결국 소용없었다고 말하지도 말자. 따뜻함을 나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자신을 찾아가라는 것, <클라우스>가 우리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무언가를 위해 달려온 날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날, 클라우스와 제스퍼를 마주한다면 영화는 당신의 삶이 그래도 썩 괜찮았다고 말해줄지 모른다.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었네요.”

“꼭 그렇지 만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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