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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들 Jun 19. 2023

나의 해고 일지
- 첫 번째 상담 이후

나한테서 일의 의미를 되새겨보다

어느 날, 같이 일하던 스태프가 그만둔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또 다른 동료 때문에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눈에서는 어떠한 열의도,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딱 봐도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언제까지 하고 그만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이번 달까지라고 답했다.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괜스레 아쉬움이 밀려왔다. 스태프의 계약을 관리하던 나였기에, 나는 회사에 해당 스태프의 근무 만료 사실을 알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촬영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나에게 내일까지만 하고 관둔다고 했다. 깜짝 놀라 되물어보니 회사에서 그렇게 하라고 '들었다면서', 그래서 자신은 내일까지만 한다는 것이었다. 스태프의 얘기를 들으니 알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차 올랐다. 담당자인 내가 모른 채, 회사에서 누가 어떻게 일방적으로 결론을 전달했다는 말인가. 배신감과 좌절감, 서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다음 날, 나는 이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사는 그럴 리 없다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자신에게도 당연히 이야기가 들어와야 하는데 자신은 어제의 일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럼 도대체 누가 결정했다는 말인가. 그보다도 나는 도대체 이 작품에서 무슨 존재인가. 자괴감이 너무나도 들었다.


   



첫 번째 상담에서 1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오르다 보니, 눈물 콧물을 가득 쏟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담실을 나오고는 그날 하루 종일 기력이 좀체 살아나질 않았다. 상담하고 나서는 개운해야 하는데, 이틀 정도는 기분이 오히려 좀 더 다운됐다고 느낄 정도였다. 상담을 괜히 한 건 아니었을까, 털어놔서 후련하긴 한데 근본적인 무언가가 변하질 않았으니 효과가 없던 건 아니었을까, 섣부르게 결제한 건 아니었나 등등의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에도 심리 상담으로 효과를 본 적이 있었으니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상담 내용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상담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게 노력했다. 상담 선생님의 한 마디와 나의 한 마디가 머리에서 재생되면서, 잊고 있었던 나의 기억들이 조금씩 건드려지기 시작했다. 


첫 상담시간에 중점적으로 나눴던 이야기는 내가 해고당했다는 사실과 나의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특히 상담 선생님은 나의 가족관계도를 그려보자고 했고, 나는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내 가족사를 술술 읊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가족사를 되돌아보며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호기심이 많았다. 새로운 것이 있으면 하던지 보던지 하는 식으로 꼭 건드려봐야 했다. 나름 천방지축이라서 얌전한 아이는 아니었다. 무언가 만들어내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서울시 환경 글짓기 대회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고, 학예회 같은 것이 있으면 반 대표로 나가서 공연을 해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평범한 일은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부모님이 맞벌이하셨기에 친구들하고 놀지 않는 시간엔, 집에 오면 TV를 끼고 사는 편이었다. 옛날엔 신문에 편성표가 인쇄되어 나왔기 때문에, 신문을 받아서는 편성표 면을 제일 먼저 찾아서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형광펜으로 칠해가며 본방 사수했다. 그때부터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모락모락 키워 왔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도 관련 전공이 있는 학교로 들어가 학교 생활을 이어 나갔다. 성격에 맞아서 그런지 4년 동안 수업 듣는 게 솔직히 재미있었다. (동기들은 어떤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졸업 후에는 자연스럽게 언론고시반에 들어가서 방송사 입사 시험도 준비하기도 했다. 2년 반의 시간 동안 결과적으로는 최종 합격하진 못했지만, 이후 드라마 프로덕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여태까지 일을 해 오고 있었다.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아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도, 나는 내가 직접 TV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행복했'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다.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태어난 우리 부모님들은, 내가 평범하게 자라 평범한 대학을 가서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 평범한 사람을 만나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는 게 최대 미덕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언론고시를 준비할 때도, 내가 이 일을 선택했을 때도, 나의 이 특수한 직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약간의 마찰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았다. (물론, 귀한 자식이 매일 밤새고 늦게 들어오고, 한 번 나가면 4일, 5일을 안 들어오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긴 했지만.)


그런 와중에 나는 내 직업에서 한 걸음 더 디뎌보려던 그 순간에 해고를 당했다. 처음엔 '해고를 당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주는 상처가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담 이후 곰곰 생각을 해보니 '해고'라는 사실(fact)보다는, 내가 원했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can not)는 생각에 더 큰 좌절을 느낀 것 같았다. 더욱이 그 '일'이라는 건, 단순히 먹고사니즘의 생계를 위한 부분도 있었지만, 나라는 존재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과도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부모님에게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에, '나 이만큼 잘하고 있고, 잘 살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좀 인정해주세요.' 하는 이 마음을, 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욕구가 컸던 것이었다. 


나는 일을 나 자신, 즉 '나'라고 동일시했던 건 아니었을까. 일은 곧 '나의 존재'였기에, 일에서 밀린 건 나 자신이 밀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더 좌절했고, 우울감을 느꼈던 것이다. 상담 선생님이 말한 '거절감'은 아마 그 부분에서 말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이 일은 내 생각보다 꽤 내 깊은 곳에서부터 뿌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다시금 내가 왜 이 일에 매달리고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반대로 나 자신이 곧 일이라고 여기다니, 그만큼 나에게 내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내가 자리 잡아야 나는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일을 통해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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