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 외의 모든 역할은 이미 다른 이가 맡았다.
— 오스카 와일드
"너는 원래 그래."
이 말만큼 한 인간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표현도 드뭅니다. 부모는 때로 이 말을 위안으로 건넵니다. "넌 원래 예민한 아이야", "넌 원래 수학을 못하잖아", "넌 원래 조용한 성격이야." 그러나 이 말은 위안이 아니라 선고입니다. 존재를 하나의 고정된 속성으로 환원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아이를 특정한 정체성의 감옥에 가두는 폭력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의 고착화는 단순한 언어 습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아이를 하나의 완성된 '명사'로 규정하려 합니다. 내향적인 아이, 산만한 아이, 똑똑한 아이. 그러나 들뢰즈가 통찰했듯이,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being)'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becoming)'입니다. 아이는 고정된 본질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1장에서 우리는 '술래 되기'라는 개념을 통해 고정된 위치를 벗어나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존재 방식을 탐구했습니다. 술래는 정해진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관계를 재구성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이제 3장에서 우리는 이 '술래 되기'의 실현태(實現態)펴봅니다. 그것은 바로 경계를 횡단하는 유연한 자아, 고정된 정체성의 틀을 벗어나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며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AI 시대의 문해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적 의미를 획득합니다. 문해력이란 단순히 텍스트를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끊임없이 다시 읽고 다시 쓰는 능력입니다. 고정된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해력의 바탕에는 유연한 자아, 즉 자신을 하나의 확정된 정체성으로 고착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와 성장의 과정 속에 열어놓는 존재 방식이 있습니다.
이름을 잃고 되찾는 과정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정체성의 유연성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우화입니다. 열 살 소녀 치히로는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빼앗깁니다. 유바바 할머니는 '치히로(千尋)'라는 이름에서 '치(千)' 자를 빼앗아 그녀를 '센(千)'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치히로는 바로 이 이름의 상실을 통해 진정한 성장을 경험합니다.
'센'으로 살아가면서 치히로는 이전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만납니다. 그녀는 욕탕에서 일하며 책임을 배우고, 오물신을 씻어내며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하쿠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용기를 발견합니다. '치히로'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머물렀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변화들입니다. 그녀는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더 넓은 자아로 확장됩니다.
영화의 절정에서 치히로는 하쿠의 진짜 이름을 기억해냅니다.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ニギハヤミコハクヌシ) - 빠르게 흐르는 호박빛 강의 신."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치히로는 어린 시절 자신을 구해준 강과 하쿠의 관계를,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과거를 되살립니다. 이름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관계의 흔적이며, 정체성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치히로가 현실 세계로 돌아올 때, 그녀는 더 이상 터널 입구에서 부모에게 매달리던 소극적인 아이가 아닙니다. 그녀는 '센'으로서의 경험을 '치히로'라는 자아 속에 통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연한 자아의 모습입니다. 하나의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고, 새로운 이름과 역할을 경험하며, 그 경험들을 자신의 존재 속에 축적해가는 존재. 경계를 횡단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존재입니다.
생성으로서의 존재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생성(devenir/becoming)"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정된 정체성의 환상을 해체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생성이란 A가 B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 항 사이의 관계 자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생성-동물", "생성-여성", "생성-어린이"... 이러한 표현들은 주체가 무엇인가로 변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의 장이 열린다는 의미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영토화란 존재를 특정한 위치, 정체성, 기능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교육 현장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영토화합니다. "너는 문과형이야", "너는 창의적이지 않아", "너는 리더십이 부족해." 이러한 규정들은 아이를 특정한 영토 안에 가두고, 그 영토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장은 탈영토화를 통해 일어납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고, 고정된 역할에서 이탈하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자신을 확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합니다. 치히로가 '센'이 되는 과정이 바로 탈영토화입니다. 그녀는 '부모에게 의존하는 소극적인 아이'라는 영토에서 벗어나 '타인을 돌보고 위험에 맞서는 주체'라는 새로운 영토로 이행합니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은 이러한 통찰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듭니다. 하이데거에게 인간 존재(Dasein)의 본질은 "기투(Entwurf)"입니다. 기투란 자신을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던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가능성을 향해 투사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규정은 언제나 불충분하며, 오히려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의 지평 속에서만 진정으로 존재합니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 역시 유사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융은 페르소나(persona)를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형성되는 가면으로 정의했습니다. 문제는 페르소나 자체가 아니라 페르소나와의 동일시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페르소나를 자신의 전부로 여길 때, 우리는 자기(Self)의 더 넓은 가능성으로부터 단절됩니다. 건강한 발달이란 다양한 페르소나를 유연하게 활용하면서도 그 어느 것에도 고착되지 않는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캐럴 드웩(Carol Dweck)의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 이론은 이러한 철학적 통찰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합니다. 고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수학을 못해",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어." 이러한 믿음은 도전을 회피하게 만들고, 실패를 정체성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반면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능력을 개발 가능한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아직 이 방법을 모를 뿐이다." 이 작은 언어적 전환이 학습과 성장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드웩의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정체성이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는 믿음, 특히 자신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실제 성취를 결정합니다. 아이가 "나는 수학을 못하는 아이야"라고 믿을 때, 이 믿음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됩니다. 그는 수학 문제를 회피하고, 노력을 포기하며, 결국 자신의 믿음을 확인합니다. 반대로 "나는 아직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습하면 할 수 있어"라고 믿는 아이는 실패를 학습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지속적 노력을 통해 실제로 능력을 향상시킵니다.
고정된 자아상을 벗어난 아이들
북클럽에서 만난 한 중학생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지우(가명)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로 규정되어 왔습니다. 성적은 우수했지만, 발표 수업만 되면 얼굴이 새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교사들은 그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발표 기회를 주지 않았고, 부모는 "넌 원래 조용한 성격이니까"라며 위로했습니다. 지우 자신도 "나는 발표를 못하는 아이"라는 정체성을 내면화했습니다.
북클럽에서 우리는 『데미안』을 읽었습니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 자신 안의 어둠을 발견하고, 기존의 선량한 아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함께 탐구했습니다. 어느 날 지우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싱클레어는 왜 자꾸 변하나요?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아요." 저는 반문했습니다. "자기가 누군지 안다는 게 뭘까? 한 번 정해지면 평생 그대로인 걸까?"
그 질문이 지우에게 작은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몇 주에 걸쳐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우는 자신이 "발표를 못하는 아이"라는 규정에 얼마나 깊이 갇혀 있었는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나는 왜 발표가 두려울까?"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발표를 잘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발표 불안은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극복 가능한 상태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렸던 것입니다.
전환점은 북클럽에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순간이었습니다. 소규모 그룹에서, 자신이 깊이 탐구한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놀라워했습니다. "저도 말을 잘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함께 분석했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 지우는 자신이 '정답을 발표하는 학생'이라는 역할이 아니라 '의미를 탐색하는 독자'라는 역할에 있을 때 자유로웠음을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발표 능력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이었습니다.
이후 지우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다양한 역할에 노출시켰습니다. 북클럽에서 토론 진행자를 맡았고, 소규모 프로젝트에서 발표를 자청했으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글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긴장했고, 때로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지우는 더 이상 실패를 "내가 원래 그런 아이니까"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번엔 이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았구나. 다음엔 다르게 해볼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례는 민서(가명)입니다. 민서는 초등학교 내내 "수학 영재"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부모와 교사들은 그녀의 "뛰어난 논리적 사고력"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다 고난이도의 문제들을 접하면서 민서는 처음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문제는 학업적 어려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촉발한 정체성의 위기였습니다.
"저는 수학을 잘하는 아이인데, 이제 못하게 되면 저는 누구죠?" 민서의 이 질문은 고정된 정체성의 취약성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수학 영재'라는 틀에 자신의 가치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한 영역에서의 어려움이 존재 전체의 위기로 번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었습니다. 주인공 게드가 진정한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와 화해하는 과정을 탐구했습니다.
"게드는 자신이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되는 게 목표였지만, 결국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요." 민서가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했습니다. 진정한 힘은 완벽함이 아니라 유연성에 있다고. 강한 나무는 부러지지만, 유연한 나무는 휘어졌다가 다시 일어선다고.
민서는 천천히 변화했습니다. 그녀는 "나는 수학을 잘하는 아이"에서 "나는 문제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기 이해를 확장했습니다. 수학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 자신이 관심 있는 여러 영역 중 하나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정체성의 유연화는 오히려 학업 성취를 향상시켰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 자아의 위협이 아니게 되자, 민서는 더 자유롭게 실험하고 실패하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유연한 자아를 위한 구체적 훈련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들이 유연한 자아를 발달시킬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합니다.
첫째, 프레임의 폭력을 인식하고 거부하는 연습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아이를 프레임에 가둡니다. "넌 수줍음이 많아", "넌 산만해", "넌 예민해." 이러한 표현들은 아이의 일시적 상태를 영구적 속성으로 고착시킵니다. 대신 우리는 상태를 과정으로, 속성을 행동으로 재진술해야 합니다. "넌 수줍음이 많아" 대신 "지금 낯선 상황이라 긴장되는구나"라고 말해주세요. "넌 산만해" 대신 "이 과제에 집중하기 어려워하는구나"라고 표현하세요. "넌 예민해" 대신 "지금 감정이 강하게 느껴지는구나"라고 인정해주세요. 작은 언어적 전환이 아이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둘째, '아직(yet)'이라는 단어의 힘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걸 못해"와 "나는 이걸 아직 못해"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담고 있습니다. 전자는 고정된 무능을, 후자는 열린 가능성을 가리킵니다. 아이가 자신의 한계를 표현할 때, 그 문장에 '아직'을 덧붙이도록 격려하세요. 이것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전환입니다. 나를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셋째, 다양한 역할 실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치히로가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보았듯이, 아이들에게 다양한 정체성을 시험해볼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북클럽에서 진행자 역할을 해보고, 가족 여행에서 계획자 역할을 해보고, 프로젝트에서 협력자 역할을 해보는 것입니다. 각각의 역할은 새로운 자아의 측면을 발견하게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아이가 실패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역할을 시도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서툴고 불완전함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부모나 교육자가 "너는 원래 이런 게 안 맞아"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다시 익숙한 정체성의 안전지대로 후퇴할 것입니다. 대신 "처음이라 어색하지? 계속해보면 달라질 거야"라고 격려해야 합니다.
넷째, 복수의 정체성을 통합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유연한 자아는 무정형의 자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중심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견고한 중심을 가지되 그 중심이 경직되지 않은 것입니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좀(rhizome)과 같은 구조입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모든 것이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점에서 연결되고 확장되는 네트워크입니다.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발견한 여러 자아의 모습들을 통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나는 때로 조용하고 때로 활발해", "나는 수학도 좋아하고 문학도 좋아해", "나는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친구들과 있는 것도 좋아해." 이러한 복수성을 모순이 아니라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일 때, 아이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유연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다섯째, 메타인지적 성찰을 통한 자기 이해의 심화입니다. 정기적으로 아이와 함께 자기 이해에 관해 대화하세요. "너는 어떤 상황에서 가장 편안하니?", "어떤 역할을 할 때 가장 에너지가 나니?", "최근에 자신에 대해 새로 발견한 게 있니?" 이러한 질문들은 아이가 자신을 관찰하고, 패턴을 인식하며, 동시에 그 패턴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고 의미화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이전에 두려워하던 것을 해냈을 때, 단순히 "잘했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순간을 분석하세요. "무엇이 달랐을까?", "어떤 생각이 도움이 되었니?", "이전의 너와 지금의 너는 어떻게 다를까?" 이러한 성찰은 변화를 우연이 아니라 학습 가능한 과정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여섯째, 실패를 정체성의 위협이 아니라 정보로 받아들이는 연습입니다. 고정 마인드셋을 가진 아이에게 실패는 "내가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아이에게 실패는 "이 방법은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정보입니다. 아이가 실패를 경험할 때, "괜찮아, 넌 원래 잘하잖아"라고 위로하지 마세요. 이것은 오히려 성과에 기반한 정체성을 강화합니다. 대신 "무엇을 배웠니?"라고 물어보세요. 북클럽에서 우리는 "실패 일지"를 작성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실패 경험을 기록하되, 그것을 다음의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시도한 것: 무엇을 하려고 했나?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나?
발견: 무엇을 배웠나?
다음 시도: 다음엔 무엇을 다르게 해볼까?
이러한 구조화는 실패를 정체성의 서사에서 학습의 서사로 전환합니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나는 이것을 배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술래로 살아가기의 의미
1장에서 우리는 술래 되기를 탐구했습니다. 술래는 정해진 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전체의 관계를 조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해합니다. 술래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으로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AI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유연성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합니다. AI가 수행하는 것은 정확한 반복과 패턴 인식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파라미터 안에서 최적화를 추구합니다. 반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은 자신을 재정의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화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는 데 있습니다. 유연한 자아를 가진 아이는 AI가 제시하는 최적해에 만족하지 않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문해력 역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진정한 문해력이란 주어진 텍스트를 정확히 해독하는 능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낯설게 읽고, 기존의 해석을 의심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해력의 바탕에는 유연한 자아가 있습니다. 자신의 관점과 이해 방식을 고정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끊임없이 갱신할 수 있는 존재만이 텍스트와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치히로가 '센'으로 살면서 더 넓은 자아를 발견했듯이, 우리 아이들도 고정된 정체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원래 그래"라는 말 대신,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고 물어야 합니다. "너는 이걸 못해" 대신 "너는 아직 이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아이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입니다. 경계를 횡단하는 유연한 자아, 술래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신을 갱신하는 존재. 이것이 AI 시대에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AI는 주어진 것을 최적화할 수 있지만, 자신을 넘어서는 것,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