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꼰. 방파제의 스페인 말이다. 해변에 파도를 막아 세우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는 곳에는 죄다 말레꼰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보통명사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말레꼰하면 누구나 하바나의 그 말레꼰을 떠올리게 된다. 거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하바나의 말레꼰은 독보적이다. 말레꼰은 올드 하바나에서 서쪽의 부촌인 미라마르로 이어지는 방파제 해단도로로 그 길이가 거의 8킬로미터에 이른다. 카리브해의 거센 파도가 이 방파제 도로에 부딪치며 만들어낸 높은 물보라 아치를 뚫고 1950년대의 올드카가 질주하는 그 흔한 쿠바의 사진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촬영된다. 말레꼰은 시가를 물고있는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를 대표하는 시그니처가 되었다. 말레꼰의 도로는 동서로 뻗어 있고 그 해안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굽이진 말레꼰의 어느 포인트에서는 하바나의 아침을 붉게 물들이는 일출을 볼 수 있고 다른 어딘가에서는 전 세계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할 수도 있다. 말레꼰의 동쪽에 이르렀을 때 해는 이미 서쪽의 호텔들과 키재기를 하고 있었다. 낮게 깔린 구름들 사이로 태양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구름은 시시각각 색깔 옷을 갈아입었다.
아마도 이때가 물 때인가 보다. 여기저기서 낚시꾼들이 나타나 낚싯대를 길게 드리웠다. 석양을 등에 입은 이들의 실루엣은 사진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피사체였다. 나는 석양을 바라보며 말레꼰의 서쪽으로 2킬로 정도를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사진을 찍었다. 거리의 연인들, 조깅하는 사람들, 낚시꾼들, 올드카, 말레꼰을 수시로 덮치던 파도와 물보라 그리고 시시각각다른 색깔로 하늘을 물들이던 노을을 쉴 새 없이 찍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해가 진 직후다. 태양은 사라지고 가로등과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도로를 밝히는 시간, 하늘은 점점 더 깊은 푸른색으로 짙어진다. 이제 사람의 얼굴을 보려면 더욱 가깝게 다가가야만 하는 시간. 저녁은 숙명처럼 사람을 또 다른 사람 곁으로 이끈다. 해가 졌다. 낮은 태양이 만들어 냈던 강한 콘트라스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세상은 아직 햇빛을 머금은 하늘과 구름이 퍼뜨리는 순한 빛들이 공평하게 퍼져 피사체의 음영을 드러내고 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짙은 어둠은 모든 디테일을 감추고, 인공조명에게 선택받은 일부만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이 짧고 극적인 순간은 일각도 안되어서 사라진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이 더욱 바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