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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이, 피셔맨스 워프

말할 수 없는 비밀, 연인들의 땅에서

by Mong

우리는 수많은 스토리들을 소비하면서 산다. 본격적인 AI와 휴머노이드 시대가 도래하면 우리는 더욱더 많은 시간과 돈을 스토리와 콘텐츠에 소비할 것이다. 소설, 영화, 웹툰, 드라마 속의 서사들은 서로 겹치고 포개져서 비슷비슷해지고 머릿속에서 쉽게 뭉개졌다가 곧 잊혀지곤 한다. 그 와중에도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내 기억의 조각들 마냥 선명해서 꺼내어질 때마다 설레는 이야기들도 있다.

주걸륜, 계륜미 주연의 "말할 수 없는 비밀" 도 그중 하나다.

영화의 배경이었던 진리대학과 홍마오청, 단수이 강변의 노을은 강렬한 대만의 첫인상이었다.

그러니 대만에 와서 단수이를 빼먹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수이의 노을을 즐기기 위해 약간 이른 오후 시간에 MRT를 탔다.


홍마오청은 1600년대 스페인의 요새로 건축되었다가 네덜란드가 점령한 후부터 네덜란드인을 지칭했던 홍마오(붉은 머리)라는 이름이 붙었고, 1867년 영국이 이곳을 조차하여 영사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0년에 이르러 비로소 대만 정부에 반환되었고 지금은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 유적이자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홍마오청 바로 옆에 진리대학이 있다. 캐나다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고 1999년 개명 전까지 옥스퍼드컬리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동서양 건축양식이 아름답고 개성있게 혼재되어 있어서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옥스포드라는 이름은 영국이 아니라 캐나다 온타리오의 옥스포드카운티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곳이 설립자의 고향이고 이 동네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학교가 설립되어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단수이 방문 직전까지 수없이 지나다녔던 동네가 옥스포드카운티였는데 그곳이 여기 단수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도대체 그 시골동네에서 무슨 여력으로 그 오래전에 이 머나먼 곳의 학교에 기부를 했을까?

이곳의 건물들과 정원들은 여기저기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풍모를 가지고 있어서 한나절을 머물며 돌아다녀도 지루하지가 않다. 영화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걷다 보면 저기 어딘가에서 주걸륜과 계륜미가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유명한 대왕카스트라가 탄생한 단수이의 라호제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홍마이청에서 내려오면 바로 단수이 옛 거리를 만나고, 조금 더 내려가면 단수이 강변으로 나갈 수 있다.

160킬로를 달려온 강물이 드디어 넓은 바다로 퍼져가는 곳. 단수이강은 단수이구에 이르러 여느 큰 강의 하구와 다름없이 느려지고 넓어져서 바다와 같아진다. 임진강을 만나러 가는 한강처럼 단수이강은 북쪽으로 흐른다. 그러니 라호제 쪽 강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아침저녁으로 발갛게 수줍은 얼굴을 드러낸다. 해가 다 떨어지기 전에 강줄기가 끝나는 곳 피셔맨스 워프로 향했다.

피셔맨스 워프는 어항으로 조성된 곳이지만 대만을 대표하는 일몰명소로 부각되면서 지금은 복합 레저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유명한 연인의 다리가 있고 해변을 따라 3백 미터 길이의 보드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연인탑으로 불리는 360도 전망대도 있다.

나는 일몰이 되는 그 순간도 좋아하지만 해가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은 후 코발트 빛으로 짙은 여명이 물든 BLUE HOUR의 하늘을 특히 좋아한다. 짙은 붉은색이 더 짙은 푸른색으로 반전되는 시간, 가빴던 호흡이 느려지고 이슬이 내려앉은 땅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오는 시간. 술시. 개들의 시간이다. 내가 태어난 시간이다. 아마도 내 DNA와 오감이 내가 세상에 나온 시간을 끝내 기억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연인들의 땅, 단수이의 푸른 밤을 뒤로하고 MRT종착역인 단수이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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