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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Jun 04. 2020

난임이 나에게 준 열등감

내 바닥을 보여주고, 내 용기를 시험했던 - 난임이라는 추억

 결혼하기 전부터 몇 년을 함께 살다시피 했던 우리 커플은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의 센스(?) 때문인지 혼전 임신이라는 선물을 받지 못했다. 연애시절, 나는 세계적인 콘돔 브랜드가 있는 회사에 몸 담고 있었는데 덕분에 통관을 막 마친 따끈따끈한 갖가지 콘돔과 여타 신기한 물건들(?)이 집에 차고 넘쳤다. 그 때문이었을까? 참 열심히 했다- 물론 피임을..^^; 그때가 나의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난임을 만나러 가는 길- 난임, 이 몹쓸 ㄱㅅㄲ-


결혼 한 지 2년이 되어가도 소식은 없고 3년 차에 드디어 나와 남편은 아기를 '적극적으로' 가져보자는 데에 동의했다. 그 전에도 피임을 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과 동시에 자기 사업을 시작한 남편, 결혼 직전 이직하여 마케터로서는 처음으로 내 브랜드를 담당하게 된 나 - 누구 하나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참으로 치열하게 먹고사느라 바빴던 우리였지만 깨알 같이 모은 짬들을 활화산처럼 태웠다. 여느 신혼부부처럼 없는 건 시간이었지 마음과 욕구는 아니었기에. 희한하게도 그토록 뜨겁던 우리는 임신을 결심하고 빠르게 식어갔다. 날이 잡히면 하나의 일과처럼 거사를 치르고 바쁘게 본인의 일상을 찾아가고 또 빨간 달이 뜨면 우울해하고 핸드폰을 붙잡아 난임 검색 결과를 보고 더 침울해지는 그런 사이클이 약 1~2년 반복되었던 것 같다.


난임은 우리를, 특히 나를 바꿨다. 미신이나 흔한 사주조차 보지 않던 나였지만 그때는 맹목적으로 임신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수집했다. 여러 임신과 관련된 '썰' 중에는 오랫동안 물리적 피임을 하면 우리 몸의 난자와 정자가 습관적으로 알아서 피해 간다는 정체불명의 설도 있었다. 사실관계는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나의 큰 자부심이었던 전 직장마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왜 그 회사는 다녀가지고... 그때는 뭔들 is... 기승전> 원망이었다.


찌질함은 하늘을 모르고 솟구쳤다. 그토록 무뎠던 내 몸은 빨간 달이 뜨기도 전에 (그전에는 절대 못 알아차렸을) 미약한 생리전증후군 마저 느끼고 찬기를 뿜어냈다. 인스타그램에서 지인의 그저 순수하고 앙증맞은 아기 사진에도 눈물이 나서 조용히 언팔을 눌렀다. 친한 친구들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는 더 속이 상했다. 왜들 그렇게 원하지도 않는 아기가 잘만 생기는데 나는 뭐람? 내 자궁은 뭐하느라 이렇게 소식이 없느냐? 무척이나 (스스로에게) 파괴적이던 나였다.


하루는 고향 친구 아기의 돌잔치에 가서 (다른 핑계를 댔지만) 아기에 대한 열등감에 중간에 뛰쳐나왔다. 그 때문이라는 설명이 하기 싫어서 죄 없는 친구의 남편이 꼰대고 잘 안 맞는다는 엉뚱한 핑계를 둘러댔다. 거리낌 없던 친한 오빠였는데 그 후로 2년 동안 그 변명을 지키느라 혼이 났다. 결혼한 친구 중에는 나만 (내 생각엔) 아기가 없었다. 어느 날은 고향 선배의 장례식에 갔는데 술에 잔뜩 취한 선배 언니는 결혼을 한지 언젠데 아직도 애가 없냐고 나를 몰아세웠다. 고향 특유의 고루한 선배 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장례 중에는 제법 귀한 장례와 관련되지 않은 주제의 농이었기에 최대한 날을 세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언니의 입에서 병원 가서 시험관 알아보라는 조언이 10번을 넘어가자 표정관리가 안되었다. 장례식장에서 나오자마자 후회를 했다. 왜 나는 바쁜 퇴근길을 쪼개 고향 동네까지 와서 시험관 상담을 해야 하는가? 타인의 임신이야말로 오지라퍼의 접근금지를 법으로 지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 가장 쉬이 하는 오지랖 폭언의 하나가 바로 이것 같다. 결혼해서 왜 애는 안 갖니?


그때부터 인공수정, 시험관이라는 '볼드모트'를 연상하게 되는 상황에 있을 때마다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종국엔 나도 저런 끔찍스러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차라리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문턱을 지나기도 전이었지만 네이버 검색으로 시험관 부작용을 찾아보며 눈물을 뽑는 나는야 top of 겁쟁이 었다. 내 하얀 똥배 한가운데 주사를 그것도 스스로 놔야 하는 상황도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일이었다. 나의 두 친언니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들을 한 선배들이었는데, 주워들은 언니들의 고된 육아를 되새기며 나의 마음속의 아기를 향한 미련을 버리길 기원했다. 하, 하지만 역시나였다. 아기를 원하던 나의 바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저만치 우울해 땅을 파고 있던 나를 이끌고 남편은 남해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행 중에 불현듯 나는 병원을 가보고 가타부타를 정해보자고 결정했다. '생각보다' 병원에서의 과정은 순탄했다. 자연주기> 자궁경 수술> 시험관 시술 등의 1년의 과정을 겪고 아기를 임신했을 때 기쁨과 동시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아기를 낳아 키워보니, 이렇게 힘든 결정으로 낳아보니 별거 아니었어. 왜 그렇게 원했을까? 후회할지 모른다는 생각 들었던 것이다. 정말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막상 극장에서 봤을 때의 시시함을 어떻게 극복하지 라는 우려였다.


아기를 낳은 지 언 11개월이 되는 지금, 그때의 우려는 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기우였다. 아기를 갖고자 그리 목숨 걸며 달려온 것은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결정이었다. 아기가 엄마의 인생을 꽃피었다는 그런 진부한 표현이 왜 나왔는지를 이해하는 아름다운 영화의 시작이었다. 절절한 육아의 고통을 뒤로한 채 오늘도 아기를 보며 내 하루의 가치를 생각한다. 이렇게 아기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한 하루.


나의 열등감은 아기라는 선을 만날 수 있도록, 이 모든 힘듦을 견디게 해 준, 가장 고마운 원동력이 되었다. 나를 토로하고 외롭게 했던 그 생각과 고민, 욕심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 같다. 아기를 만난 일은 인생에서 제일 신기한 경험이 맞다. 육아로 인한 나의 커리어, 인생 모든 번뇌는 아기의 미소와 새근새근 잠자리 소리에 눈 녹는다. 희한한 경험이다. 참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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