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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Jul 24. 2020

제 아들 걱정일랑은 접어두세요

아들맘을 향한 연민과 편견에 대한 소회

하필 아들이라니!


태명 행복이의 성별이 밝혀진 날, 임신 내내 딸을 고대했던 남편은 노골적인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의 실망이 내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던 이유는 험난했던 난임의 여정, 그 끝에 절정과도 같았던 시험관의 로또 같은 결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안의 태아가 아직 하나의 존재, 내 가족이 될 누군가 같지 않아서- 어떤 성별의 아기인지는 그저 배냇저고리의 색깔 정도로 연결되는 부차원적인 정보 그뿐이었다.


내 뱃속 아이가 남자라는 것에 무언가 불편한 느낌을 받은 건, 그 이후 지속된 타인들의 대화에서였다. 배안의 아기가 아들이라는 것을 안 지인들의 반응은 크게는 두 가지 나뉘었다.

크게 한 가지는 어머 어떡하니~ (진심 한가득),

다른 하나는 아들'도' 귀엽다더라 (위로의 찡긋)


이 외에도 둘째는 딸 낳아라 (아직 첫째 임신 중인데요?), 아들은 아들일 뿐이다(무슨 말씀이신지?), 아들 엄마는 목소리가 커야 된다던데 임과장 딱이네! (디스한건가?) 등등이 있었다.




위로 언니가 둘, 딸만 셋인 집에 태어난 나는 사실 여아에 대한 로망도, 남아에 대한 편견도 없었다. 일단 남자아이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본 적도 별로 없고 아들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다. 미지의 세계- 아들맘의 목소리를 탐구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온라인에 펼쳐진 아들 맘이 가진 고난 들은 다채로웠다.


남의 남자가 될 게 뻔한 걸 키운다는데 장가보내지 말까요?

아들만 둘이라는 소리에 집주인이 계약을 안 하겠대요.

아들 있는 집이라고 층간소음에 주범이래요.


딸을 가진 엄마들이라면 당최 알 길 없는 한 많은 사연들 투성이었다. 사연마다 끄덕이는 댓글들이 사회를 향한 성토장이나 다름없었다. 왜들 그렇게 아들을 싫어하나요?


남아선호사상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남아기피현상을 두 눈으로 확인해보니 이처럼 억울한 일이 없었다. 하필이면 왜 아들을 가졌냐는 식의 태도와 질문에 화가 나기도 했다. 아니 내 미래를 걱정해 줄 거면 돈을 주지 왜 그런 돈 안 드는 위로를 하느냔 말이다. 아들을 낳아 키우는 게 걱정할만한 일인가를 나 스스로 사고하거나 판단하는 건 고사하고, 성별을 기준으로 내 임신과 노력을 고과 다루듯 평가하는 분위기가 화가 났다. 그 무엇보다 이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겠냐고요?




임신 막달쯤 어느 날 인가 나와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외식을 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또 똑같은 질문을 듣기 싫어 한껏 인상 쓴 얼굴로 '물어보지 마시오'를 쓴 채 승차했다. 눈치를 집에 두고 출근한 기사님은 역시나 똑같은 화살을 질문했다. 이번엔 평소 조용한 남편이 호들갑을 떨었다. 저도 왜 딸이 아닌지.. 너무 아쉽네요. 하하!


비 오는 밤거리에 택시에서 하차를 하자마자 눈물이 펑펑 쏟았다. 그간 받아온 실망의 대답이 온통 남편의 출처인 양 고성을 쏟아부었다. 그 고생을 하고 아기를 가졌는데 왜 배우는 게 없느냐며, 아이가 건강한 걸 감사할 줄을 모르냐고, 그 '하필이라는 너의 아들'을 배에 품고 있느라 퉁퉁 부은 다리와 허리를 보고도 하는 이야기가 맞냐고 소리쳤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 말이 맞는데도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느라 내내 기분이 언짢은 나에게도 하는 말이었고.


집안에 들어와서도 한 시간을 넘게 울었다. 만삭의 애미를 울게 만든 역적의 남편은 그날 이후로 성별의 성짜도 꺼내지 않게 되었다.




영 어려울 것 같았던 내 인생에 아이가 생긴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인생의 모또였던 범사에 감사하자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타성에 젖어 시무룩한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이대로 정신줄을 놓다가는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이른 휴직을 하고 사람들을 덜 만났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공연히 나를 걱정해준다며 하는 불필요한 피드백에 안녕을 고하니 내 인생에는 다시 감사함이 남았다. 아이의 성별이 아니라도 어떤 주제던 나를 위한다며 불안과 걱정을 전이하는 사람들은 과감하게 정리하고 살자는 인생 대진리를 배운 뜻깊은 일이었다.




하필 아들이라는 불순한 고민과 걱정은 우습게도 너무 쉽게 막을 내렸다. 아기를 낳은 직후였다.

아뿔싸, 이 아이가 아들이던 딸이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리 아기, 숲이 인데!


아들에 대한 숱한 걱정, 아들이라 막무가내래- 아들은 애교도 없대- 아들은 아들이래- 이 많은 이야기 속에 간과한 사실은 그 막무가내인, 애교도 없는, 아들인 아이가 내 아이라면 그 모든 것이 사소한 무엇이 된다는 점이다. 내 아이라는 사실을 빼고는 모든 것이 부수적인 요소가 되는 이 마법, 아이가 가진 모든 것이 소중해지는 그런 마법이 분명 존재했다.




영화 [어바웃타임]을 보면 주인공이 다친 동생을 살리고 싶어 과거에 돌아가 의도치 않은 변화까지 만드는데 그게 바로 자신의 아기가 바뀌는 일이었다. 약 3억 마리의 정자 중 하나의 확률로 태어났던 아이였으니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아예 다른 아기의 탄생으로 귀결된 것이다. 주인공은 그 사실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 동생의 사고를 막지 못한다.


결혼 전 나는 그 장면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어차피 내 아인데 다른 아무개를 키우면 어때? 더 좋게 과거를 바꾸지- 아주 단순하고 무지했던 생각이었다. 640KB의 컴퓨터 용량이면 충분할 거라던 빌 게이츠의 망언만큼 어불성설의 생각이었다.


지금 나는 신의 그 어떤 제안 - 숲이를 임신한 과거로 돌아가 숲이 아닌, 아주 천재의 아기 혹은 미모의 딸, 모두가 원하는 울음이 짧고 혼자 잘 노는 아기 등 원하는 누구와 바꾸자는 물음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결코 바꿀 생각이 없다. 그건 내 아이가 지금 남아라서, 혹은 애교가 많은 편이어서, 엄마를 좋아해서 이런 이유로 설명이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숲이는 나와 함께 자랄거고, 그 과정에서 겪는 많은 희로애락이 내 삶의 이유 중 하나 임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듣지 않아도 알게 되는 깨달음이다.




혹여나 최근에 성별을 듣고 아들이라는 타인의 편견에 그때의 나처럼 울고 있는 임부가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속없는 타인의 가벼운 혀 끝에 고심하지 마시라. 중요한 건 그 아이는 남자애나 여자애인 게 아니고 당신의 아이라는 것. 그것은 당신에게 되풀이된 수많은 이유들을 그저 한낱 점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

끝내 사람들의 성토와 우려가 나와 연관은 있을지언정 사랑하는 데 전혀 영향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아이 이기에. 그 이상의 답은 무의미하다.



숲이is뭔들! 암만 그렇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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