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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Sep 09. 2020

여행을 떠나는 네가지 방법

여행을 떠나는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다.   


1. 여행을 실제로 떠난다.  

2. 가고 싶은 여행지가 나오는 소설을 읽는다.  

3. 여행을 떠난 것처럼 이야기한다.  


장소 : 전라남도 광주

소설 : <주사위 주사위 주사위>, <그럼 무얼 부르지>  - 박솔뫼 지음


3일 전에 박솔뫼 소설을 읽으며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전, 나는 눈을 뜨자마자 씻고 짐을 챙겨 서울역으로 향했고, 서울역 매표소 앞에서 조금 고민하다가 광주행 티켓을 샀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출발해서 1시간 50분 만에 광주송정역에 도착했다. 지하철로 환승해서 문화전당역에 내린 나는 박솔뫼 소설 <주사위 주사위 주사위>에 나온 등장인물의 동선을 따라 걸었다.  


오전엔 구 전남도청사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소설 속에선 공사중이었지만, 2014년 완공되어 개방되어 있는)을 구경하고 도청앞 광장과 그 주변을 걸어다녔다. 광주는 어릴 적부터 교과서에서 보고, 선거 철마다 개표 방송을 통해 보고, 5월마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행사를 진행할 때 뉴스에서 보고,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보았지만, 실제로 온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책과 미디어로 보고 들은 광주와 직접 방문해서 보고 들은 광주 중에서 어느 쪽이 광주 가깝지? 전자같기도 하고 후자같기도 한데, 전자와 후자 둘다이거나, 둘 다 아닐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 내가 간신히 옆모습 일부만을 보고 있는 구도청에 들어갔을 때 그때는 5.18주간으로 임시 개방되었을 때였다. 왜인지 계단을 내려가며 복도의 창으로 보이는 광주 시내의 모습은 건물 상가 불빛 들에도 불구하고 옛날 나조차도 본 적 없고 라디오에서나 그림책에서나 들어본 작은 마을처럼 보였고 언덕이 있고 누군가 불을 밝히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그런 감각은 기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떠올려보려고 해도 나는 알려고 들지 않고 나 자신은 알려고 들지 않고 음 부서지기 전에 한 번 더 가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만 들었다.” <주사위 주사위 주사위>, 박솔뫼


걸어다니다 보니 허기가 져서 뭘 먹을까 생각하는데 <그럼 무얼 부르지>의 바(bar) 주인이 소개해준 죽과 떡과 국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설 속 바 주인은 죽과 떡과 국수에 대한 이야기를 두 페이지가 넘도록 쉬지 않고 이야기한다. 주인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으며 점심엔 죽집을 찾아 죽을 먹고, 식후에는 간식으로 떡집에서 떡을 사먹었다. 죽과 떡은 평소에 자주 먹지는 않지만, 광주에 와서 먹는 죽과 떡은 왜인지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죽은 팥죽을 먹었는데 어렸을 때 팥죽을 먹고 체하는 바람에 팥은 십년이 넘도록 입에도 못 대는 음식이었다.  


못 먹는 음식이 먹는 음식이 되는 순간만큼 극적인 것도 없다. 팥을 못 먹다가 맛있게 먹게 되고, 피자의 빵 부분을 못 먹다가 남김 없이 먹게 되고, 콩을 못 먹다가 각종 콩(강낭콩, 병아리콩, 완두콩 등)으로 콩밥을 해먹고, 여름엔 콩국수를 즐겨 먹게 되었다. 주문한 팥죽은 윤기가 매끄럽게 흐르고 김이 모락 모락 났다. 나는 팥죽을 후후 불며 깨작 깨작 먹다가 조금 식은 다음에는 큰 숟갈로 퍼먹었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 맛있게 먹었다. 팥죽이 만들어낸 포만감은 여행과 잘 어울렸다.  


“바의 주인은 저기, 하고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때 그 사람은 우리에게 저녁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왜 그런 걸 묻지 이 새벽에? 그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먹었어요 진작. 남자는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또한 말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뇨, 다름이 아니라 이 근처에 죽이 맛있는 집이 몇 군데 있거든요 떡이 맛있는 그러니까 떡집도 있어요 국수가 맛있는 집도 있고 아 아까 말한 죽은 팥죽인데 팥죽이 특히 맛있어요 호박죽도 있고 깨죽도 있고 그냥 쌀죽도 있고 그런데 닭죽은 없어요....” <그럼 무얼 부르지>, 박솔뫼


저녁엔 국수집에서 국수를 먹었고, 여행은 거기서 종료되었다.  


광주를 보았고(정말 보았나?) 잘 먹고 잘 돌아다녔으니 크게 아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혼자이지만 여러 목소리와 들려와서 외롭지 않은 여행이었다.  





ps. 여행을 떠나는 방법에는 사실 한가지가 더 있다.  


4. 1번, 2번, 3번을 섞어 냄비에 넣고 죽처럼 푹 끓인다.  이제 '실제 떠난 여행'과 '떠난 척하는 여행'은 누구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여행을 떠난 사람조차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진 출처 : 518기념재단, LG케미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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