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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Mar 24. 2019

아무도 선택해주지 않는 세상

[고독한 개짱이] 탄탄멘


하루 종일 바빴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꾸벅거리면서 머릿속으로만 이걸 해야 하는데, 저것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마음만 바쁜 하루였다. 이상하게도 일이 많아질수록 행동력이 떨어진다. 순서를 잡지 못하고 머릿속이 한번 엉켜버리면 무얼 먼저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우왕좌왕하다가 자꾸 일만 더 늘어나는 기분이랄까.


해결책은 알고 있다. 그럴 땐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당장 처리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을 먼저 해결하는 게 도움이 된다. 청소를 할 때는 눈에 보이는 가장 큰 것 먼저 처리해버리는 편이 좋지만 일을 할 때는 반대다. 작은 일부터 처리해나가다 보면 의외로 큰 일의 윤곽이 잡힐 것 같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떨 땐 차라리 회사 일이 낫다. 방법을 알고 마감이 있으니 일단 하면 된다. 언젠가 끝이 난다. 그러나 늘 문제는 나의 일. 방법도 모르겠고 마감도 없는 나의 일. 이게 막혀버리면 잘 흘러가는 듯하던 일들마저 갈피를 잃어버리니 큰일이다.


요즘 나의 일 중 가장 큰 일이라면 아무래도 독립이다. 해본 적이 없으니 방법도 모르겠고 나에겐 마감도 아직 없다. 부모님은 여전히 나의 독립이 마뜩잖다. 넌지시 이야길 던져놓긴 했지만 사실상 모르게 진행되는 일에 다름없어 도움을 청할 수 없다.

그래도 그나마 이리저리 조언을 구할 친구들이 많아서 다행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들에 감사하지만, 그들은 쓸데없이 현명하게도 꼭 마지막에 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선택은 너의 몫이야.”


* 탄탄면공방의 탄탄면.


그 사이 애매한 집들을 또 몇 개 놓쳤다. 가격도 위치도 괜찮았는데 화장실이 엉망인 집. 좁은 건 아닌데 공간 활용도가 영 좋지 않은 집. 오래된 빌라에서 볼 수 있는 바람이 숭숭 들어올 것 같은 덜컹거리는 낡은 쇠 창문틀을 가진 집. 집을 구해서 나가야 할 날짜의 마지노선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애매한 부분을 보게 되면 망설여진다. 기다리면, 조금 더 나은 집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다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냥 누군가가 이쯤에서, 음 이 정도면 괜찮아, 이곳으로 하자. 정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건 내 친구들의 말마따나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나의 일이란 걸 잘 알고 있다.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하는 날은 대체로 대충 때우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러고 싶지 않다. 어쩌면 내가 혼자 있어야 하는 이런 시간이야 말로 가장 맛있는 걸 먹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장 좋은 곳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참 내 선택을 미루기 좋은 세상에 살고 있었다. 이미 부모님이 정해놓은 집에 들어가면 되고, 동생이 고르지 않은 방이 내 방이 됐다. 누군가 추천해주는 화장품이나 옷을 사고, 무얼 하고 싶냐고 물으면 아무거나, 식사도 주로 친구들이 고른 식사 메뉴를 따라가는 편이었으니.


탄탄멘은 고추기름에 땅콩소스를 섞어 맛을 낸 국물이 특징인 중국 사천 지방의 면요리라고 한다. 어떤 맛있는 걸 먹어야 할지 또 한참 혼자서 고민하게 될 것 같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눈 앞에 보이는 집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익숙한 일본 라멘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새로운 맛이 나를 맞이한다. 콩 류 식재료 특유의 느끼한 듯 고소한 맛에 고추기름의 매운맛이라니, 처음 먹어보는 맛있데 내 입맛에 딱 좋다. 왜 이런 걸 지금까지 몰랐을까. 잘게 썰어 올려놓은 파와 간 고기를 국물에 듬뿍 적셔 면과 함께 먹는데 젓가락질을 멈추지 못하고 순식간에 해치웠다. 무료로 제공되는 밥까지 달래서 남은 국물에 비벼먹고 나왔다.


혼자 선택해야 하는 일은 갈수록 더 많아질 거다. 난 아직은 미룰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스스로 결정하는 습관을 들여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나만의 방식도, 마감도, 조금씩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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