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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Sep 23. 2024

비오는 날, 도시

느지감치 그림일기 9

 1.

 사람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거의 본능이라고 할 만하다. 그림을 그림으로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이 소통은 아주 긴 시간을 넘어 전해졌다. 언어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 사이를 이어주던 일, 그러니까 선사시대의 소통에 관해 우리는 동굴벽화에서 살짝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힘차고 유장한 그 그림에는 소가 있고 말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별이 있다. 그러니까 생존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꿈이 있다. 그 시간을 살던 사람들의 삶 전부이다. 그 삶을 상징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상징은 기호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다. 동그라미를 기호로 보면 0이라는 숫자 아닌 숫자 하나를 가리키지만, 사람들은 동그라미에서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고 밥그릇으로 보이기도 하다가 내일부터 쪼그라들 보름달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해석하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비오는 날은 해석의 여지가 빗방울만큼 많은 상징으로 가득하다. 빗방울을 통과한 공간은 비틀리고 휘어 있으며 색은 변형되고 번진다. 더욱이 도시의 빛은 인공적이며 과장되어 있다. 자극적이다.

 뭐, 거창하게 말하자면 칸딘스키적인 미학을 경험하는 순간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마추어로서 부족함을 감추려는 꼼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처음으로 20호에 도전하는 재미난 날이기도 했다.


비오는 밤, 도시 (72.7×53.0)


 2.

 처음 접하는 20호 캔버스의 폭은 그저 한팔 길이였으나, 채워나갈 때 느끼는 광대함은 물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혼자 떨어진 느낌을 준다. 걸어도 걸어도,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다.

 사람의 역사에 있어 그림과 나이를 견줄만한 것이 있다면 술이다. 술은 그 중독성부터,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많은 폐해를 끼치고 있지만, …블라 블라 블라….

 기분 좋게 한잔하고 나선 초저녁의 거리가 비에 젖어있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해야 할까? 얼른 집에 가 그림을 그리자. 2차 가지 말고. 술은 물렁하게 감정을 주물러놓아 뭐든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물론 이 작용 또한 폐해를 가지고 있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대충 짐작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역사를 통해 그림과 술이 길게 같이 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비오는 저녁, 도시 (72.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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