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17
1.
내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리 우주에서, 지구를 포함해 외계 다른 곳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중 양성생식을 하는 종들이 있다면, 이들을 모두 합쳐, 단일 종목으로 가장 많은 싸움은 부부싸움이라는 주장에 내 돈 2만 원과 작년에 선물 받은 세로줄무늬 겨울양말을 걸겠다.
… 별다른 반론이 없으니, 우리우주 안에서 가장 흔한 싸움은 부부싸움이라는 명제는 참이라고 선언하고, 이제 이 내밀한 싸움의 특징이나 따져본다.
부부에 관해 떠도는 몇 가지 속설이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안 되는 말이 있다. 이는 인간이 각자의 성을 가지고 태어나 결혼과 함께 자웅동체로 변한다는 반과학적 주장으로,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장에 각자의 몸으로 나타나는 신랑과 신부를 보면서 현실과 위배되는 거짓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어이다. 일단 칼이 등장한다는 정황으로 싸움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칼과 물의 관계를 오해한 주장임은 곧 밝혀진다. 용도 상 칼은 물을 베려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물은 칼을 날카롭게 갈 때 필요한 물질로 이 둘은 모종의 사건을 준비하고 있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칼에 묻은 무언가를 닦아낼 때에도 물이 등장한다. 이때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 깨끗이 처리하는 팀플레이다. 좀 섬뜩하기는 하지만, 이 말은 부부싸움을 가장한 남녀 간의 모종의 협업을 은유한다. 무슨 사건이 있었을까?
세 번째는 ‘싸우는 부부가 좋은 부부는 아니지만, 싸우지 않는 부부는 부부가 아니다.(아닐 확률이 높다.)’는 현재 많이 통용되지 않는 명언이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2.
부부싸움이라는 광대한 주제를 말하는 경우 두서도 없고 갈래도 없이 장황해질 확률이 높다. 따라서 고리타분하지만 그 시절 ‘6하 원칙’에 따라 따져본다.
1) 누가? 싸우는가. 간단하다. 그들이다. 양성생식은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후손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유전자 조합이 가능한 생식 방법이다. 이를 선택한 암컷과 수컷, 인간 여자와 남자가 그들이다. 양성생식이야말로 다양한 변이의 가능성을 담보한다. 인간을 예로 들자면 인간종을 여자와 남자로 나누고 섹스라는 과정을 거쳐 각자 반씩 유전자를 내놓아 후손을 만들기로 합의한 경우이다. 그러나 이 합의 말고는 다른 어떤 사안에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에 싸우는 그들이 되었다.
2) 언제? 지구상에 생명의 먼동이 튼 후,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고 양성생식을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을 지나 호모사피엔스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빼먹지 않고 싸우고 있다. 하루로 비유하자면 자정부터 자정까지이다. 부부가 싸우면 안 되는 금지된 시간도, 싸울 수 없는 제외된 시간도 없다. 그래서인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싸움의 양상 또한 복잡하게 변화해 왔다.
3) 어디서? 단순히 장소의 문제라면 그들이 존재 가능한 모든 곳이 싸움의 현장이다. 구체적으로 지목하면, 부부의 싸움은 관계의 특성상 주로 주거공간에서 일어난다. 침대 위, 부엌, 화장실, 거실, 아이방, 베란다 등 모든 장소가 가능하지만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현관을 주목해야 한다. 얼굴을 마주하는 첫 장소가 싸움의 시작점이 된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거공간은 피해자가 발생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자녀나 어르신 동거인들, 그리고 바닥과 벽을 공유하는 이웃이 싸움의 피해자들이다.
이외에도 기타 공공장소를 비롯해 욱, 올라오는 장소 모두가 싸움의 현장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에는 독립적이면서 나름의 방음효과 때문인지 승용차 안도 결투의 장소로 인기가 높다. 기술의 발전으로 부상한 사이버공간도 빼놓을 수 없다. 싸움의 두 주체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휴대폰이라는 기술은 공간을 극복하고 싸움을 가능하게 했다. 카톡으로 통한다면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 없이도 싸움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