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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Sep 29. 2024

그 시절의 실전

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15

 1.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독립군의 군가를 부르며 나가니 싸움은 싸움이었다. 싸움 중에도 큰 싸움이며 진짜 싸움이었다.

 80년대 얘기를 꺼내면 달달한 ‘라떼’라고 눈 흘길 사람이 있겠으나, 커피로 치자면 쓰디쓴 에스프레소라 할 만한 시간이었다. 그중 어떤 하루를 따라가 보자. 그것은 진짜 싸움이었으니까.

 학생들은 땅바닥에 앉아있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나와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한다. 가끔 혈변도 있다. 당시 유행했던 잠자리 안경이 많이 보인다. 어느 학회나 서클에 속하지 않는 나 같은 ‘단순가담자’들은 대부분 뒤쪽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다. 파도타기 같은 것이 다가오면 “우우우~” 뭐 이런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다시 앉는 일 정도는 따라 한다. 눈길은 역시 인상적인 여학생을 따라가는 일이 많다.

 과별로 진지하기도 하고 순진하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한 구호 같은 것을 돌아가며 외치고 나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큰 깃발을 흔들며 행진을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사뭇 축제이다.

 적이 등장해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은 전하는 말 대신 느려진 걸음걸이로 전해진다. 앞사람과 가까워지면서 후욱, 긴장감이 올라온다. 고함소리는 더욱 커진다. 쿠웅, 컹, 여기저기 보도블록 깨는 소리가 울린다. 도시에는 자연석이 없기 때문이다. 경찰이 확성기로 경고 어쩌고 하는 소리가 모기소리처럼 앵앵거린다. 우리가 선 뒤쪽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일순간 저 앞사람들 머리 위에서 ‘펑, 퍼엉’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한다. 흰색 연기가 날리기 시작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흩어져 우왕좌왕 도망가기 시작한다. 적잖은 수의 사람은 최루탄을 피하며 돌을 던진다. 아무리 감정이 오르더라도 뒤쪽에서 돌을 던지면 안 된다. 죄 없는 앞사람 뒤통수가 희생양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의 뒤에는 또 사람들이 있기에 뒷길은 막혀있어 주로 좌우로 흩어진다.

 눈에는 랩을 붙이거나 물안경을 쓰는 친구들도 있지만 곧 습기가 차올라 오히려 시야를 막는다. 그리고 코밑에는 치약을 바른다. 최루탄의 독기를 지우는 민간요법라고 할 수 있는데, 꽤 효과가 있다. 머리가 아플 때 다리를 세게 꼬집어 더 큰 통증으로 통증을 이기는 일(잊는 일?)과 비슷하다고 할까?

 흩어지는 학생들 중에는 손을 꼭 잡고 도망가는 밉상 커플이 있다. ‘뛰기 불편할 텐데.’ 보통은 이렇게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어떤 날은 싸움의 시작과 함께 순식간에 앞사람들이 흩어져 우리 같은 ‘단순가담자’들이 선봉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시커먼 안면보호철망 사이로 전경의 표정까지 보인다. 뛰어야 한다, 뒤로, 뒤로, 옆으로. 이때 분실물이 많이 생긴다. 그 귀한 삐삐까지도.

 경찰 쪽 여기저기에서 시위자 영상을 촬영하고 있다. 잘 보이려고 머릿기름으로 치장한 친구들도 있다. 일명 ‘지랄탄’이라고 연속으로 최루탄을 쏘는 장갑차가 치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보다 더 무서운 경우는 전경들 앞으로 청바지 위에 하얀 콩깍지 같은 헬멧을 쓰고 곤봉을 든 일군의 무리가 아른거릴 때이다. 악명 높은 백골단이다.

 이들은 전경들처럼 대열을 이루지도 않고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냥 낱개로 뛰기 시작해 자기 마음대로 타깃을 정하고는 곤봉을 휘두른다. 뒤도 돌아보면 안 된다. 이들은 싸움의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싸움의 진정한 대상은 백골단이 아니었음에 이때 도망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2. 

 가볍게 싸움 얘기나 하는 이 자리에서 깊이 있는 분석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피 흘린 자들에 대해서는 짚어봐야 할 것 같다. 

 현실에서 최루탄에 눈물 흘리고 곤봉에 머리가 깨지거나 그렇게 경찰에 연행되는 사람, 돌에 맞아 다치거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으로 서로를 미워하는 사람, 그러다가 죽은 사람까지. 모두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얼굴, 같은 사회에서 숨 쉬고, 밥 먹고, 술집 옆 테이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젊은이들이었다.

 세상 참 지독하게도 안 바뀐다. 조금 이룬 것 같다가도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또 이렇게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싸움은 끝이란 게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리한 것이다. 아니면 태생부터 끝이 없는 싸움일 수도 있다. 그래도 시시포스가 싸우는 무의미보다는 조금이라도 낫지 않을까? 

 싸움에는 흔히 승자와 패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싸움은 그만두는 순간 승자도 패자도 아닌 그저 피해자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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