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13
1.
운명이라는 말은 대개 정해져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이 정도면 운명이다.
운명과 싸운다는 말은, 그러니까 이러한 정의 상 백전백패의 싸움이다. 그럼에도 자꾸 싸우려 든다. 일단 시작은 꿈꾸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존재’를 꿈꾼다. 신神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기계에 인간의 기억을 얹어 이론적으로 영원한 존재를 상상하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사람에게는 되든 안 되든 일단 덤벼 싸우려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싸움 또한 본능인가?
운명과의 싸움은 무조건 지는 싸움이다. 그런데도 한다. 이것에 관한 은유가 시지포스이다. 죽지도 못하는 시지포스가 죽을힘을 다해 산 정산에 바위를 밀어 올리는 순간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진다. 이보다 무의미한 일이 어디 있는가? 신이라는 존재는 이런 무의미를 형벌이랍시고 떠넘겼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의미에 열심히 개기는 일이 의미라고 자위하며 산다(실존주의에 따르면). 물리학자인 스티븐 와인버그도 ‘우주를 이해할수록, 우주는 그만큼 무의미해 보인다.’고 했다. 어쨌든 세계가 무의미한 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무의미라는 운명과 인간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일단 세상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우기고 볼까? 다시 격투기에 능한 사람에게 ‘무의미’라고 이름 붙이고 서로를 노려보며 링에 올라야 하나?
무정형의 무의미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무의미를 노려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의미를 제대로 바라보는 자세이다. 그 자세의 시작은 무의미를 응시하는 눈빛이다. 먼 바닥을 향해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바라보는 시지포스의 시선. 아무 의미도 담지 않은 그 텅 빈 눈빛.
2.
나는 최근에 현실에서 그 눈빛을 보고야 말았다. 운명을 바라보는 무연한 눈빛, 텅 빈 시선.
아침이었다. 어린이집이 운영하는 버스가 서있었고 그 앞에 엄마 몇이 서있었다. 엄마들은 버스 창문을 향해 반나절이나마 육아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굳이 감추지 못하고 과장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뒤를 지나던 나는 버스 안에서 엄마를 지그시 내려 보는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네 살도 안 돼 보이는 아이의 시선은 의미를 넘어 무의미를 관통하면서 현실 어디에도 초점을 맺고 있지 않았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자의 체념과 포기와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즐거운 시간을 기다리는 기대와 들뜸 또한 절대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을 떠나보내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원망과 책망, 저주 같은 감정 또한 완전히 넘어선 무엇이었다.
나는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 시선은 조용히 내게 말을 했다. 세상에 대한 책망도 없으며 세계의 진실을 깨우치려는 노력도 무의미하다고, 그 무의미에 좌절하는 기색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세상을 멀리 두고 바라볼 뿐이라고.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버스 안)를 잊고 싶어 하는 작은 욕망이 잠시 스쳤지만, 그 또한 본능적인 수긍하는 능숙함도 배어 있었다.
이 처연한 순간을 만날 때, 어른이라면 술을 마신다. 무의미에서 도망가는 것이다. (도망, 이것이 술이 가진 이유이다.)
나는 후회한다. 그 공허를 쓰다듬는 눈빛, 처연을 넘어 무연한 시선, 그 텅 빈 공허를 찍지 못했다. 2초 정도의 시간 안에 휴대폰을 꺼내지 못해 무의미라는 운명과 싸우는 어린 시지포스의 눈빛을 놓치고 말았다.
3.
얼마 전 여편께서는 내게 운명의 신탁을 전했다.
“당신은 점점 외로운 늙은이가 될 운명이야.”
“왜에?”
“하는 짓이 그러니까.”
그래, 하는 짓이 운명이다.
하는 짓은 변하지 않기에 운명은 굳건하고, 살아있는 모두는 다시 하는 짓으로 운명과 싸운다. 운명과 싸우는 일을 ‘운명한다’고 한다면, 그래서 ‘운명했다’는 말은 종국에 그 싸움에서 졌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운명하고 또 운명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린 시지포스가 가지고 있는 그 눈빛을 회복해야 한다. 자명하게 질 것이지만 싸우는 일 또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싸움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세로, 그 자세에서 나오는 눈빛으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