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에 분패, 세 번의 타발적 히치하이크에 관한 소고

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23-1

by 김병호

선의에서 출발한 배려라고 해서 모두가 받는 이에게 정서적 애무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배려가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을뿐더러 동기를 의심할 만큼 화를 부르는 때도 있다. 그렇다면 또한 싸워야 하는데, 이 싸움은 가리고 피해야 할 것이 많아 교묘한 기술이 필요하다. 누구는 이것을 사양의 기술이라고 부른다.

모양새가 불쌍해 보여서 그런지 내게 이런 기억은 적지 않다. 그중 히치하이크와 연관된 이야기 셋.

첫 번째는 10여 년도 더 지난 일이다. 글 쓰는 사람 예닐곱이 모여 술자리를 가진 곳은 집에서 10㎞ 정도 떨어진 관광지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사는 동네로 다시 넘어오는 버스는 8시면 끊기는 데다 큰 절을 끼고 있는 관광단지라 식당마다 민박도 같이하고 있어, 아예 자고 아침에 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원래 제멋대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술기운이 군불을 땐 덕도 있지만, 처음부터 워낙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언성이 올라가고 누군가는 큰 소음으로 문을 닫고 호기롭게 밤길에 나서기도 한다. 아마도 그게 나였던 듯싶다.

얼핏 봐도 12시는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어둠과 산중 한기를 헤치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은 이내 산으로 접어들었고 고개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나무가 많은 편도 1차선 한밤 고갯길은 족히 3km 너머 이어진다.

30여 분을 걸었다. 머릿속에서 불타던 분노의 열기는 어느새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기로 바뀌었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산새 우는 소리에도 오싹, 날카로운 전기가 흘렀다. 그 순간 동네 술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늦은 밤이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하얀 소복 입은 여자였어,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 뒤로 어떻게 여자를 추월했고, 액셀을 얼마나 밟아서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웂어. 분명 여자였거든. 그담부터 밤에는 절대 그 고개로 안 댕기잖어. 내가.”

반짝이는 별들이 있어 저 위 좁은 하늘은 알아볼 수 있지만, 나무와 땅과 도로까지 구별할 수 없이 시커먼 어둠으로 뭉쳐있는 이 고개가 바로 그 길이다. 자존심이고 취기고 모두 던지고 술자리로 돌아가고도 싶었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몇 분에 한 대씩 차가 지나가기는 하지만 차 불빛에 대고 손을 흔들어봤자, 이 어두운 산길에서 어느 누가 불콰한 중년의 아저씨를 위해 차를 세우겠는가? 한밤중 산길을 혼자 걷는 소복의 여자가 귀신이라면 비틀거리는 중년의 남자는 도깨비이다. 나라도 못 할 일이었다.

이제 방도는 없다. 앞에 걷는 여자를 만나든, 힘겹게 살아남은 계룡산 호랑이와 눈 마주치든, 걸어야 했다. 잘 걸으면 집까지 2시간. 희미하게 보이는 도로의 노란 갓길차선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한 지 20여 분이 지나자 길은 완전히 산중에 들었다. 하늘은 더 좁아졌고 어둠은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나는 점점 무서워졌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이 나타났다. 그냥 어둠이던 공간에 도로와 나무가 따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허연 모습이 더 무서웠다. 차가 다가오는 소리에 맞춰 도로 바깥으로 비껴 걸었다. 겁쟁이 중년은 어둠과 여자와 산짐승과 갈팡질팡하는 차, 모두가 무서웠다. 그런데 산중의 남자를 멀찌감치 비켜 중앙선을 밟고 휙 지나가야 할 차가 속도를 줄였다. 이내 걷는 속도에 맞춰 차가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지? 아, 뭐지?’

내가 놀란 만큼 차 안에 있는 사람도 놀랐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놈들이 차에서 내려 달려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소복 입은 여자들이 요즘은 차를 끌고 다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는 천천히 다가와 내 옆에서 거의 정지했다. 나는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려 차를 바라보았다. 보는 이에게는 그저 겁에 질린 표정이었을 것이다.

1톤 트럭이었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면서 한 여자의 모습을 드러났다. 하얗다. 그러나 소복 대신 길게 늘어뜨려 묶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하얗다. 운전석에서 한 남자의 그림자가 앞으로 나섰다. 자세히 보니 나이가 많은 노부부였다.

“아니 모 헌다고 이 밤에 여그를 걸어서 넘는댜? 사람보다 귀신이 많어. 행여 안 좋은 생각 품은 겨?”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느라 말을 못 잇는 사이 조수석의 할머니도 한 마디 거들었다.

“참구 타유. 냄새야 뭐 옷 빨믄 되지. 사람 숨통은 빨래헌다고 물러주지 않잖여.”

“괜찮습니다. 거의 다 왔는데요, 뭐.”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마 산길과 차 안, 어디가 덜 위험한지 무의식이 계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운전하던 할아버지가 한마디 던지고는 차의 속력을 올렸다.

“낼 아침에 숭한 뉴스 나와두 나는 안 보면 그만여.”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뛰기 시작했다. 큰 드럼통들이 빼곡히 실린 화물칸 난간을 손으로 두드리면서.

음식점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을 수거해 가축을 키우는 노부부 또한 산중에서 날 보고 놀랐을 것이다. 싸우면 안 되는 배려였다.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사양했으면 큰일 날 뻔 한 배려였다. 옷가지이야 뭐 빨면 될 일이고, 버려도 그만이니까.


IMG_4993.JPG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22화존재의 바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