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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Apr 11. 2021

뒤죽박죽 가족 연대기 18

사설 辭說

 19. 사설(辭說): 잔소리나 푸념을 길게 늘어놓음판소리 따위에서연기자가 사이사이에 엮어 넣는 이야기.


 바쁜 일상 때문에라도 간단하게 차리고 빨리 먹을 수 있는 끼니가 아침 밥상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곡창지대의 딸인 엄마는 어찌 되었든 생선 한토막이라도 올려야 했다. 이런 생활 때문에 엄마는 많은 시간을 주방에서 보냈다. 옛 주방은 아귀가 맞지 않는 문 때문에 밖에서 넘실거리는 한파를 막아야 할지언정 환기를 걱정할 구조는 아니었다. 엄마가 말년을 지냈던 윗집은 오래된 양옥집으로 주방 환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서둘러 데려간 폐암의 원인이 주방 공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쉬움은 공기 좋은 전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점이다. 이 문제는 좀 복잡했다. 여러 입장이 걸린 복잡한 문제였지만,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다. 지금은 형과 막내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제주도에서 산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막연한 여유를 떠올리지만 그곳에서 사는 일 또한 생활이다. 바다와 산이 가까운 생활이다.

 생활일지언정 엄마가 조금이라도 누리지 못한 일은 아쉽다. 


 바다가 있다. 쉼 없이 꿈틀거리는 짙푸른 대양이 있다. 바다의 언저리에는 파도가 있다. 파도는 자기 앞의 파도를 밀며 온다. 또 뒤를 따르는 파도에 밀리며 달려온다.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고 파도는 달린다. 그렇게 육지에 이른 파도는 처음 만난 흙을, 바위를 한번 쓰다듬고는 거품으로 사라진다.

 왜 달려야 하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왜 거품으로 사라지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밀고 밀리며 어딘가를 향하고는 거품으로 사라진다. 한 세대가 달려가고 다음 세대가 뒤를 따른다.     


 사실 물은 달려가지 않는다. 그저 위아래로 흔들릴 뿐이다. 밀려가는 것은 바다를 꿈틀거리게 하는 에너지이다. 그렇게 엄마 아버지는, 아니 엄마 아버지를 이루고 있던 에너지는 거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우리 세대가 어느 육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음 세대는 그렇게 다시 우리를 밀며 나아가고 있다. 그럴지언정 바다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일견 허망하다. 허망하고 허망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는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의 원자와 분자들이 있다. 138억 년 전 빅뱅을 시작으로 계속 팽창하고 있는 우리 우주 안에는 1천억 개의 은하가 있고 그리고 그 은하마다 다시 1천억 개의 항성이 있다. 항성은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다. 이렇게 많은 항성 중 하나가 우리 태양이다. 이런 태양의 아주 작은 조무래기 중 하나가 우리가 붙어있는 지구이다.     


 이 우주 안에서 떠도는 원자, 분자는 태양과 같은 항성에서 만들어졌다. 항성의 연료로 타면서 수소가 헬륨이 되고 점점 무거운 원자들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별이 폭발하면 텅 빈 공간의 먼지로 떠돌다가 성운의 한 점으로 빛을 내다가 그중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은 지구를 이루는 물질이 되고 또 그중 아주, 아주 극소수의 몇은 인간을 이루는 원자가 되었다. 자신을 인식하고 우주를 느끼며 각자의 삶을 이루어나가는 사람은 이렇게 먼 우주에서 스스로를 불태우는 별과 똑같은 원자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왜 사는지 별 관심 없이 복달복달 서로를 들볶으며 한 생을 소비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 인간 모두는 선발된 존재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국가대표는 선망의 대상이다. 올림픽과 같은 세계대회에 나가려면 먼저 국가대표가 되어야 하지만 어떤 종목은 국가대표되는 일이 세계 1등보다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여간 국가대표 그 자체만으로도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영광이다. (이 예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이런 것과 상관없는 그저 비유이다.)     

 우연히 국가대표로 뽑힌 선수는 없다. 그때까지의 전 생을 바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에 합당한 재능이 없는 경우도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국가대표가 된다는 것은 여러 외적 조건이라는 도우 위에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이라는 토핑을 얹은 결과물이다.


 그렇게 선수촌에 들어왔다. 수많은 종목의 선수들이 모여 있다. 같은 종목에도 체급이 나뉘어있다. 그 안에서 더 기록이 좋은 선수가 있고 그를 목표로 피땀을 흘리는 선수도 있다. 국가대표 안에도 1등과 꼴등이 있으며 또 중간에 선수촌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밥을 해주는 사람도 있고 행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움직인다.         


 하찮아보일지라도 어쩌면 우리 모두의 생은 선발된 것일지도 모른다.

 숫자라는 방식으로는 셀 수 없는 우주의 원자들 중 정말 미미한 숫자만이 우리 은하에, 우리 태양계에, 그리고 지구를 이루고 있다. 다시 그중 아주 극소수만이 생명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렇게 의식이 있는 우리 인간으로 모여 있는 것은 정말 소수의 원자들이다. 우리는 선발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국가대표 선수들은 선수촌에 들어온 과정을 기억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이 생을 부여받기까지 과정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이렇게 국가대표는 허망하지 않다.


 이번 생에 뽑혀, 봄풀을 쥐고 흔드는 바람을 내 것으로 하고, 밑 빠진 노을을 바라보는 가을 저녁 또한 선물 받았다. 물론 거품이 될 줄 알고 육지로 향하는 파도처럼 언젠가 그칠 것이고 그전에 다시 바위에 찢기는 고통도 있을 것이지만, 선수촌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트랙에서 넘어져 까진 무릎을 대수롭잖게 생각한다. 


 원자들이 모인 생에서 우리는 부모와 자식 사이로 얽히고, 남녀 사이로 만나고, 친구 사이로 흔들리다가 다시 다른 부모와 자식 사이로 얽혀 지내고 있다. 선수촌은 이렇게 얽힌 그물이고 우리는 그물의 매듭으로 서로 각자의 경기를 끝내고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것이다. 

 국가대표 선수촌에 들어왔다는 것은 정말 운이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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