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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애진 Oct 01. 2021

To infinity and beyond!

선을 만나 가로막혔을 때







1. 초등학교 시절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던 '방과 후 학교' 활동은 어느덧 서른에 접어든 내게 아득해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또렷한 기억이 몇몇 있다. 내 나이가 지금 나이의 불과 3분의 1이던 시절, 나는 방과 후 학교 수업으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준비했다. 3급을 목표로 ROM과 RAM의 차이, CPU의 뜻 같은 것들을 열심히 암기하던 기억이 난다. 필기시험을 치르는 장면은 내 머리에서 지워져 버렸으나 강렬히 뇌리에 박혀버린 장면이 있었으니, 바로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필기시험 결과를 확인한 오후였다.


지금은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필기 합격 점수가 70점 이상이었다. 파도처럼 온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기대와 초조함을 머금고 확인한 내 점수는?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69점이었다! 맨 앞줄에 앉아있던 나는 선생님께 호소했다.


"69점이나 70점이나 그게 그건데 그냥 합격시켜주면 안 되는 거예요?"

"69점이면 거의 70점이나 마찬가지잖아요!"

"1점 차이로 떨어지다니 말도 안 돼요!"


말이   만무한 억지였으므로 선생님께서도  말에 긍정하는 대답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살짜리의 진심 어린 하소연이 길어질수록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것만 같은 선생님의 눈빛에 어느 정도 위로를 받고 진정이 됐다. 그러나 마음  켠에 69 정말 70  수는 없는지,  물음표가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2. 중학교 2학년 1학기 수학에 등장하는 개념 중 내게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순환소수'였다. 그중에서도 순환소수를 분수로 바꾸는 원리가 가장 신기했다. 끝도 없이 늘어지는 순환마디를 뺄셈 하나로 간단하게 없애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이 개념은 더 크나큰 충격으로 나를 인도했는데, 뺄셈을 이용한 이 원리에 따르면 0.99999… 는 분수로 바꾸었을 때 9분의 9가 되어 1과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0.99999… 와 1은 분명히 다르게 생긴 숫자인데, 왜 소수를 분수로 바꾸기만 하면 1이 된다는 거야? 설마 수학에도 허점이 있는 거야? 아니야, 3분의 1은 소수로 바꾸면 0.33333… 이고, 여기에 3을 곱하면 1 되니까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해. 뭐지? 헷갈려!





3. 몇 년이 더 흘러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극한값을 배웠다. 그제야 다시 0.99999… 와 1이 떠오르면서 납득이 되는 듯했다. 이후로는 수학을 전공하지 않아 더 깊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상의 수학적 지식은 없다. 다만 어쭙잖게나마 '인간의 성숙'과 나의 69점, 그리고 극한값을 연결시키고 싶다.



인간이 품은 미성숙함에 관한 콤플렉스는 그것의 극복을 지렛대 삼아 인간의 성숙을 지지, 지향한다.



몇 년 전 이런 괴상한 문장을 썼다. 마치 영어로 된 문장을 번역해놓은 듯한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시 생각해보건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꽤 간단했구나 싶다. 성숙이란,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절대 올라설 수 없는 완전함, 그 정점에 다가가려는 과정이 성숙일 뿐, 미성숙과 성숙의 관계는 반대가 아니다. 미성숙의 극한값이 바로 성숙이다.


인생의 어느 한 장면에 멈추어서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환상 속의 그대'였구나. 그래서 그 열 살짜리가 그렇게나 억울했구나. 심지어 69점을 확인한 그날 이후의 일들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너무 실망해서,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게 속상해서, 나도 모르게 잊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잊은 걸까?


하지만 본가에 그대로 있는 내 옛날 책상 서랍 속엔 워드프로세서 3급 자격증이 고이 모셔져 있다. 어떻게 땄는지도 모조리 잊을 만큼 69점, 그 억울한 점수에 압도됐었지만, 장면 속의 나는 몰랐을 수밖에. 나의 가능성은 69를 지나 70에 도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유한을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0.99999… 와 1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무한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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