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비밀
내가 현재 힘든 거에 대해서 다들 위로해주고, 격려해줄 거야!
처음엔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바로 지인들에게 밝히려고 했다. 가족은 말고. 가족들에게 말하면 뭔가 갈등의 씨앗이 될 것 같았기에. 보기 좋게 실패했다. 지난날 나에게 우울증을 밝히는 건,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 빨간 안경을 건네는 것과 같았다. 내가 위축됐던 네 가지 장면을 말해본다.
내가 정신과에 전화를 걸기 직전, 나는 한 카페에 친구와 함께 있었다. 운을 뗐다.
음... 내가 너무 힘들어서 정신과 한번 가보려구
기쁠 때, 화날 때, 자랑하고 싶을 때 그리고 불안으로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모든 순간에 나의 솔직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참 행운이다.
명환아 다 힘들어. 너무 힘든 거에 집중하지 말구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거 약 먹으면 오히려 막 중독되가지고 나중에는 약 없으면 상태 더 안 좋아지고 그런 거 아니냐? 나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 친구였는데... 이 친구는 뭔가 말없이,
그거 별 거 아니라더라 그래 잘 생각했어.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번 치료해보면 좋겠네~
정도의 위로를 해주고 용기를 줄 줄 알았는데... 평소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들어주는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역시 누구나 힘들어하는 걸 가지고 나 혼자 유난을 떠는 걸까? 아닌 척 그냥 살면 되지 않을까? 수십, 수백 번 되물었던 질문을 또 하게 됐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라... 긍정적으로... 그게 안 되니까 이러는 거긴 한데.
그 순간,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위로랍시고 운동을 해보라고 조언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럽게 떠올랐다.
그때 그 친구의 기분이 이랬겠구나... 니가 뭘 안다고 그 따위 조언질을...
그렇게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귀에 공허하게 도달했다.
약물치료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을 만났다. 전혀 비즈니스적이지 않은, 학생 때 만난 친구들. 내가 말을 할 때 '아 이게 실례가 되려나?' 같은 자기 검열을 해도 되지 않는 그런 편한 친구들. 그날, 이 친구들에게 먼저 내가 현재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공감을 잘해주고, 응원해주며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들이니까.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던 그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솔직히 이제 우울증 환자 보면 무서워.
이런 말 좀 그렇긴 한데 아예 그냥 격리됐으면 좋겠어
2018년 말, 당시에 전 국민의 눈과 귀는 한 PC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향했다. 티비를 켜면 온통 그 이야기로 도배가 됐다. 그때 마침 피의자의 가족이 피의자가 장기간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네이버에는 '김ㅁㅁ 우울증' 등이 실시간 검색어로 뜨고 있었다. 국민들은 혹시나 저 병력으로 피의자가 감형될까 우려와 분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다 그런 건 아닌데..
속으로 되뇌며 그 이야기가 그저 연애와 직장 등 더 가벼운 주제로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내가 우울증으로 힘들다 고백하려던 용기는 물거품이 된 뒤였다.
대신 한 가지 깨달은 건 있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고, 남성 중심사회에서 남자로 컸다. 학벌주의 사회에서 들어봄직한 대학을 나왔고 대학을 졸업할 때 빚이 없었다. 내 나이 서른을 향해 가는 여태껏 사회적 약자가 돼 본 적이 없었다. 사회적 약자에게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고 맘 편하게(그런 내가 멋있어 보인다는 자아도취도 함께) 말하던 지난날의 나, 그 사회적 약자가 된 오늘의 나, 참 대조적으로 다가왔다. 이건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까지 가지 않는다. 그 입장이 되어보면, 내 사고는 애초에 편견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날 나는 다짐했다. 약물치료를 받는 동안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겠다고. 그것은 아직 내가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었다.
스타트업지원재단에서 일을 시작한 것도 이유가 된다. '이 동네 참 좁구나' 느낀 건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채용을 할 때 그 사람 어떤지 레퍼런스체크 하는 게 참 많았고, 나에게도 실제 한 대표가 전화를 해서 그 친구 어땠는지 물어보는 경험을 하게 되니, 나는 계산적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계산의 끝에는 늘 "밝혀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라는 답이 있었다. 나를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을 테지만, 작년에 나의 인간관계는 상당히 넓어지고 있었고 그 관계는 아직 깊이가 더해지지 않았을 때였다.
마트에서 알바하는 서울대생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이 분은 본인이 서울대 다닌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누구나 하는 실수를 해도 "쟤가 공부머리만 있지. 일머리는 없네." 식의 이야기를 듣는 게 싫어서 그런다고 했다. 그때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인이 아는 정도에서 다른 사람을 참 쉽게 규정하는구나 느꼈는데, 내가 딱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어떤 실수를 할 때 사람들이 "쟤가 우울증이라..." 하는 게 두려웠다.
언제부터인가 유명인, 특히나 젊고 어린 유명인이 실검에 올라오면 불안하다. 설마...? 대게는 틀리는데, 그날은 틀리지 않았다. 인기 아이돌 한 명이 목숨을 끊었다. 친한 친구였던 아이돌이 같은 선택을 한지 몇 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기분이 처져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에겐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할 즘 우울증이 함께 이유로 올라왔다.
쟤 전에도 자살 시도하지 않았나? 어차피 언젠가 죽었을 거네.
연예인이 보여지는 직업인데 그 정도 악플 받았다고 자살을 하냐? 저 정도도 못 견디면 애초에 연예인을 하지 말아야지.
온라인 댓글 아니고, 내 귀로 들은 이야기다. 그냥 넘겼다. 때로는 틀림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넘기는 게 더 이롭다. 어차피 저들도 살다가 바닥을 치면, 그때 본인들이 저 말한 걸 후회하겠지 정도의 자기 합리화를 했다. 나의 입은 우울증에 관한 한 꾹 닫히게 됐다.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몇 존재한다. 주변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줄 때가 종종 있는데, 이 친구가 겪는 힘듦이 (어디까지나 내 판단이지만)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구덩이를 가리키며 '저기 위험하지 않으니까 들어가 보라'라고 말하는 건 폭력이지만, 내가 먼저 구덩이에 들어가 '여기 안전하니까 들어와 볼래?'라고 말하는 건 용기를 주는 일이다.
그때 내가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저 문장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 친구가 어디 가서 내가 우울증인 걸 말하고 다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은 상당히 사소해졌다. 정신과라는 워딩을 최대한 지운채, 아침에 밥 먹었냐고 묻듯 가볍게 말해본다.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봐도 좋을 것 같아.
사실 나도 지금 받으면서 치료 중이거든. 생각보다 별거 아냐
많이 힘든 그 친구가 나처럼 망설이며 고통의 터널을 계속 걸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렇게 나는 술이 우울증을 악화시킬 수 있기에 술 먹자는 약속이나 제안을 거절했고, 우울한 감정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3km를 뛰는 최소한의 노력을 이어갔다. 그리고 내가 먹는 약의 양은 서서히 줄어갔다.
당신에게 우울증 친구가 없는 이유,
여섯 번째 에피소드 마침
P.S. 제목은 생각 많은 둘째 언니로 유명한 장혜영 님의 당신에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이유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