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삶, 되돌아본 진실
그녀에게는 명함이 있다. 작가. 레너드의 부인. 그리고 바로 자신.
영화 디 아워스의 첫 장면은 버지니아 울프에 주목한다. 흘러가는 강물. 옷을 입고 황급히 밖으로 향하는 그녀. 레너드를 향한 유서가 그녀의 독백으로 흘러간다.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그녀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다. 그녀의 모습이 강 속으로 삼켜진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편지조차 남기기 힘들어진 그녀. 더는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남편 레너드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무너지는 정신 앞에서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온전히 살아가는 것. 흐른 세월처럼. 더 깊은 곳으로. 그녀가 버텨낸 시간만큼 빠르게. 그녀에게 망설임은 없다. 그녀의 소설 속 셉티머스의 죽음처럼 그녀는 레너드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다.
영화는 버지니아가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던 시기, 그녀가 집필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클라리사의 아침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다른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세 여성의 아침은 마치 한 인물의 일상을 비추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영화는 각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녀들의 하루를 쫓으며 일상의 파문을 보여준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버지니아에게는 남편 레너드가 있다. 출판사를 가진 그는 그녀의 창작을 지지한다. 그녀가 쓴 글은 그를 통해 언제든 발간될 수 있다. 글을 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그녀를 둘러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바느질을 하듯 글을 써야 하는 존재로 그곳에 서있다. 고용인들은 그녀를 제멋대로라고 여기며 비난한다. 그녀가 여성이라면 해야 할 것들에 손을 놓고 있음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레너드 조차 산책을 하겠다는 그녀에게 그 삶이 부럽다는 말을 던진다. 집은 그녀를 옥죄고 가두는 장소,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둘째를 임신한 로라는 남편의 생일을 준비하는데 분주하다. 남편은 그녀에게 자상하며 그녀를 위해 꽃을 사다 주는 사람이다. 연극의 무대처럼. 로라는 완벽한 가정이라는 연극 속 '엄마'를 연기하고 있다. 틀 안에서 '엄마'이자 '아내'인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대를 내려올 것 같은 모습이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만들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은 굳어있다.
클라리사는 죽어가는 리처드를 간호하며 자신의 삶을 보낸다. 리처드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준비하며 그녀는 공허한 자신을 채우려 한다. 마치 댈러웨이 부인 속 클라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리처드는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묶여 있다.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파티에도 그는 기뻐하지 않는다. 그조차도 자신이 아닌 클라리사 본인을 위한 것이라 전한다. 그녀는 리처드의 말에 서운해하면서도 파티를 준비한다. 하루를 간신히 넘기는 리처드의 현재는 버지니아의 모습을 닮아 있다.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현재.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는 그에게 시상식의 공로상도 파티도 중요하지 않다. 침묵을 덮기 위한 파티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슬픔과 고통을 유예시키는 단 하루의 파티. 파티를 여는 이유에 단지 명목이 필요했을 뿐이다. 레너드처럼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클라리사.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어긋나 있다.
리처드 : 당신을 만족시키는 게 내 유일한 생존 목적 같아.
클라리사 : 그래? 우린 원래 그렇게 살아. 다들 그렇게 살아. 서로를 위해 살아가지. 의사가 말했잖아 죽긴 왜 죽어? 못 들었어? 이렇게 몇 년이라도 살아갈 수 있어
리처드 : 당신의 삶은 어쩌고? 샐리는? 내가 죽어야만 자기 삶을 챙기겠네.
클라리사 : 리처드, 파티에 와줬으면 좋겠어. 올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면 알려줘.
그녀의 현재는 리처드와 함께했던 가장 행복한 어느 날에 멈춰 있다. 파티처럼 공백이 없는, 가득 찬 그때. 그녀는 다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녀들에게는 명함이 놓여 있다. 역할로 존재한 그 명함 앞에서 그녀들의 삶은 지워져 있다. 개인이 없다. 흐려진 삶에 자신을 맞추려 간신히 애를 쓰고 있거나(버지니아) 새로운 가면을 만들어 버티고 있거나(로라)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최면(클라리사) 한다. 그들의 예정된 균열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로라의 집으로 친구 키티가 찾아온다. 로라의 표정을 단박에 알아본 키티는 로라 못지않게 괴로움을 느낀다. 평생 원하는 걸 가졌던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원하던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며 좌절한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 될 것이라는 로라의 위로에 키티는 자신의 불안을 털어놓는다. 불임이라는 사실이 남편 레이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것이다. 로라는 키티에게 자신을 비췄을 것이다.
둘째를 임신했지만 정작 로라는 행복하지 않다. 타인에게 그녀는 행복한 가정을 가진 사람이다. 다정한 남편과 아들. 사람들이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에 과연 그녀 '자신'이 있는 것일까? 댈러웨이 부인을 보며 그녀는 소설 속 클라리사와 자신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겉은 화려한, 그러나 비어있는 삶. 결심을 마친 그녀는 어린 리처드를 맡기고 떠난다. 리처드는 그런 그녀의 결심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떠나려 하지 않는다.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케이크를 완성했고, 아이를 맡겼고, 죽기 위해 약을 가져왔다. 자신이 죽어버리면 달라질까. 죽음이 모든 걸 끝내지 않을까. 그녀는 죽음을 결심하지만 결국 해내지 못한다.
클라리사는 불안했다. 언제든 리처드가 자신을 떠날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와 행복했던 여름의 기억, 그 순간이 함께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심지어 그와 오랜 기간 함께 했던 루이스가 나타나자 버거웠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떠날 것 같았다.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루이스는 말한다.
루이스 : 리처드가 떠났던 날, 기차에 타고 유럽을 횡단하며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어요.
리처드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했던 클라리사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한다. 사실 그의 대답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리처드에게 벗어난 뒤에야 루이스는 자유를 느꼈다고 답했으니 말이다. 루이스의 대답은 리처드가 그녀에게 했던 말과 같은 선을 달리고 있다.
버지니아는 언니를 만나 자신이 억누르고 있던 현실을 표출한다. 그녀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현실과 작품 속의 삶. 두 개의 삶은 그녀의 곁에서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있어서 별개의 사람이다. 평범하지 않은, 현실과 거리가 먼 그런 사람이다. 그들은 버지니아 앞의 현실을 보지 않는다. 그저 그녀를 쉽게 재단할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현실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버지니아 : 언젠가 내가... 달아날 것 같아?
언니 : 그래, 언젠가.
언니가 떠난 뒤 버지니아는 런던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레너드가 쫓는다. 레너드는 그녀에게 정신을 차려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그 한 마디가 그녀의 억눌렸던 감정을 건드린다. 치료를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죄수처럼 의사들이 그녀의 삶을 정했다. 레너드는 그녀를 위해 인쇄소를 차렸다고 답한다. 글을 쓰며 그녀가 제정신을 찾기를 원했다고,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사랑해서 벌인 것이라 답한다. 그녀는 두 번의 자살 시도와 발작, 수많은 병을 앓았으니까. 그런 자신을 따르지 않는 그녀에게 그는 배은망덕하다고 말한다. 런던에 돌아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정신이 맑지 않아서라고 판단한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는 답한다.
버지니아 : 정신이 맑다면요? 내 정신이 맑다면 이렇게 말하겠죠. 난 어둠 속에서 혼자 고통받아요. 깊은 어둠. 내 상태가 어떤지는 나만 알아요. 매일이 무서워요? 내가 사라질까 봐? 레너드 나도 매일 그게 겁나요. 이건 내 권리예요. 모든 인간의 권리죠. 교외의 질식할 것 같은 마취제 속이 아니라 런던의 거친 삶을 원해요. 그것이 내 선택이에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 정적에서 행복해지고 싶어요.
레너드는 결국 다시 런던으로 돌아갈 것이라 답한다. 그녀는 레너드에게 말한다.
버지니아 : 삶을 회피하면 평화를 못 얻어요.
이 한마디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죽음을 결심했던 로라에게로 향한다. 로라는 죽음으로 삶을 회피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 차려진 무대 아래로 내려올 준비를 시작한다. 그것이 버지니아가, 그녀의 소설이 로라의 현재를 바꾼 것이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는 버지니아에게 레너드는 어떤 인물을 죽일 것이냐고 묻는다. 그녀는 시인이자 선지자인 인물을 죽일 것이라 답하며 말한다.
버지니아 : 누가 죽어야만 남은 이들이 소중함을 깨닫죠. 대조하는 거예요. 시인이 죽어요. 선지자요.
리처드 : 문제는 세월이야. 파티 끝난 후의 세월. 또 그 후의 세월. 당신을 위해 목숨을 부지해 왔어. 이젠 날 놓아줘. 이상하지 않아? 모두가 겪는 일인데. 파티에는 못 갈 것 같아. 클라리사. 날 아주 잘 보살펴 줬지 댈러웨이 부인. 사랑해. 우리만큼 행복했던 두 사람은 없었을 거야.
그 말과 함께 리처드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 리처드의 죽음으로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에 준비했던 음식을 버린다. 그때 리처드의 엄마인 로라가 등장한다. 로라는 리처드를 버렸던 자신을 욕을 해도 좋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로라 :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죠? 감내해야죠. 그래요. 아무도 날 용서 못하겠죠.
죽음 속에서 나는 삶을 택했어요.
이 한 마디가 클라리사를 마지막으로 각성시킨다. 그녀 스스로가 리처드에게 희생하는 존재로 얽매여 있었던 것을 되짚고 깨닫는 것으로 말이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버지니아의 죽음을 다시 비춘다. 버지니아는 말한다.
버지니아 : 언제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삶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마침내 그것을 깨달으며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그런 후에야 접는 거예요. 우리가 영원히 함께한 세월을요. 영원한 그 사랑을요. 영원한 그 세월을요.
버지니아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녀가 쓴 소설로 인해 로라와 클라리사는 새로운 삶을 직시하게 된다. 여성의 역할로만 지정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존재’하는 삶을 말이다. 다른 시대의 어느 날이 흘러가고 있지만 세 사람의 '그날'은 현실과 마주하는 하루였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명함의 틈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세월 속에서.
- 디 아워스(The hours, 2002), 감독_스티븐 달드리
- 원작 마이클 버닝햄_세월
- 하루를 마주 볼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