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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주먹 쥔 손을 폈을 때

그림책 '무지개 물고기'(마르쿠스 피스터)

by 초연이

꼭 쥐고 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믿음, 어떤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마음들. '당연히'라는 수식어를 붙여 나의 인생을 가꾸어나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갈래가 생길 때가 있어요. 꼭 쥐고 있느라 손에 땀이 배인 줄도 모르고, 그 땀의 짠내가 누군가에게 풍길지도 모른 채로, 나만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그 갈래의 방향은 더 알기 어렵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인생의 장면들을 마주하면 참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떨 땐 가슴 절절히 슬프고 또 슬퍼서 누구를, 무엇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를 무의미하게 파헤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때론, 모든 응어리가 다 녹아내리듯, 이루 말할 수 없는 개운함이 온몸을 감싸기도 해요. 무엇보다 분명한 건, 조금씩은 꼭 쥐고 있던 내 손을 잠시나마 힘을 빼고 폈을 때, 꽁꽁 싸맨 마음의 목도리를 잠시 풀고 내려놨을 때, 평온한 강물이나 잔잔한 햇살 같은 것을 좀 더 쉽게 맛보게 된다는 거예요.






그림책과의 인연도 사람과의 인연 같습니다. 무궁무진한 그림책들 속에서 어떤 책을 발견하고, 그 책과 내 손이 닿기까지의 인연을 생각하면 참 신비롭습니다. 그리고 책 표지를 펼쳐 그 내용을 곱씹게 되는 시간,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그 책을 공유하는 시간은, 그 인연을 더욱 신비롭게 만듭니다.


이번에도 신비로운 인연으로, 마르쿠스 피스터의 그림책 '무지개 물고기'를 만났습니다. 여러 기회를 통해 제목도 익히 들어보았고, 시리즈가 몇 권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제대로 꼭꼭 씹어서 소화시켜 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반짝이는 비늘을 자랑하는 물고기의 꼭 다문 도톰한 입술이, 괜스런 아집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다부진 신념 같기도 해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떤 환한 햇살이 비추는 것 같아, 이 페이지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꽁꽁 싸매고 있던 무언가를 스르르 풀던 순간. '당연히'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로 바뀌는 순간. '꽁꽁'이 '사르르' 녹기 시작하는 그 첫 순간이 참으로 어려운데, 그 어려운 걸 해낸 주인공의 번뇌와 용기가 크게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작은 지느러미 끝에 붙어 있는 '반짝이는 비늘 하나'. 처음으로 그 하나를 다른 물고기에게 건네던 순간. 내가 가진 것을 꼭 누군가에게 나눠줘야만 옳은 건 아니지만, 때론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이상의 것을 말하는 듯 합니다.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용기'를 내길, 유연함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그리고 내 마음을 기꺼이 내어 놓기까지가 쉬울 때도 있지만, 생각보다 어려울 때가 더 많습니다. 나를 지탱하게 하는 자존심을 잠시 부드럽게 만들어 굽힐 수 있게 하는 힘, 그리고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먼저' 사과하는 힘. 너의 의견도 충분히 괜찮다고 한쪽 귀를 열어둘 수 있는 아량, 나의 곁을 과감히 내어줄 수 있는 여유로움,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이 만질 수 있게 허락해 주는 끄덕임. 이 모든 것에는 작고 큰 '용기'가 필요함을 너무나도 절실히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아름답게 해 주던 여러 개의 '반짝이는 비늘'을 다른 물고기들에게 하나씩 나눠준 주인공 '무지개 물고기' 주변이 훈훈해졌습니다. 삭막함, 답답함, 곤란함과 같은 것들을 부드럽게 해결해주는 마법.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함께 있는 이 모습이 참으로 홀가분해 보입니다. 표정 없는 물고기 그림들 주변으로 온돌의 기운이 느껴지고, 그저 따뜻하며 찰랑찰랑 가볍습니다.






어느 날 들른 카페에서 정갈하게 정리되고 꾸며진 화분들을 보았습니다. 정갈함 속에서, 어느 쪽으로 가지가 뻗어나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각자의 모습으로 가지를 뻗고 모양을 만들어간 식물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주먹 쥔 손을 풀고 땀을 잠시나마 식히며, 그 시원함 속에서 홀가분해지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이라도 산뜻해지는 인생을 사는 것이 현명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무지개 물고기'의 용기를 보며 그 현명함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유연함을 용기있게 시작하는 것. 우리 모두, 가볍게, 산뜻해지면 좋겠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한결 더 조화로워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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