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휘휘 휘두르는 시어머니
시어머니는 지난 9월 한국으로 가셨다가 1월 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셨다.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남편의 항공혜택 덕에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가는 시어머님. 우리 부부가 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 그것도 어머님이 살던 집으로 돌아온 것도 어머님이 미국 집에 오지 않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4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오신 어머님은 미국에서 3개월을 지낸 후, 한국에 가시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님은 미국에 20년 넘게 영주권자로 살아오셨다. 미국 이민국에서는 6개월 이상 미국 밖을 나가면, 더 이상 미국에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 영주권을 뺐을 수 있다. 세 아들이 모두 미국시민으로 미국에 살고 있고, 한국에는 싸우기만 하는 언니 하나뿐 다른 친척은 없으니 고국에 머물다가 영주권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그녀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가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일 년의 절반을 그녀와 함께 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안 계셨던 지난 4개월간, 나와 남편은 그 집을 고치고 청소하는데 온갖 애를 썼다. 나름 물리적 창작물을 만들고 DIY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거대한 집을 고치는데 매달리니 손이 퉁퉁 붓고, 손목이 시큰거렸다. 의자에 앉아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던 일을 하던 사람이 준비 없이 노동의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우울하기도 했다. 집 고치러 시집왔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다.
하지만 나름 재미있기도 했다. 쓰레기를 치우고, 고장 난 곳을 고치면서 점점 나아지는 집의 모습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70년간 쌓인 바닥의 묶은 때를 벗겨내고 실내화를 신고 다닐 수 있는 집이 되기까지 바닥을 닦고, 닦고 또 닦았다. 어머님이 오신 순간부터, 우리의 지난 4개월간의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시어머니를 처음 본 건 2021년 봄이었다. 남자친구였던 남편과의 결혼을 위해 그의 부모님을 뵈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물론 시어머니를 뵙기 전에 엉망진창인 그 집을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남편과 직장 동료 둘이 큰 집에 살면서 거실, 부엌 등은 시어머니의 창고역할을 하는 집이라 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시어머니는 샌프란시스코 가장 중심의 부촌에서 아버님, 시동생과 따로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국 집은 이렇게도 사는구나 하며 넘어갔다.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순진했다.
그리고 2021년 봄, 시어머니를 봤을 땐 충격에 말을 잊지 못했다. 내 상식선에서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미국집의 거실 천장에는 조명이 없다. 램프 같은 간접 조명을 사용한다. 선물을 한가득 사들고 집에 들어간 나는 조심스럽게 어두운 거실을 통과해 빛이 나오는 부엌으로 향해갔다. 어머님은 요리 중이셨는지 칼을 들고 나오셨다. 거대한 몸으로 부엌에서 나오는 불빛을 가리며 등장하는 칼을 든 그녀의 실루엣을 마주했다. 눈이 점점 어둠에 적응하자 어머님의 작고 웃는 얼굴이 보였다. 브라를 하지 않아 커다랗게 축 처진 가슴이 그대로 비치는 얇은 면티에, 며칠 안 감은 듯 잔뜩 헝클어진 머리. 온갖 먼지와 양념들이 묻은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어머님은 “엄마가 너무 늙었지? 다른 한국 아줌마들은 예쁘던데. 실망했겠다.”하시며 나를 맞이했다.
예쁘장한 얼굴을 한 어머님은 얼굴과 전혀 다른 몸과 옷차림으로 부끄러운 듯 나를 식탁에 앉히셨다. 그리고 연신 과일을 깎으며, 나 하나, 남편에게 하나씩 주며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예비 며느리가 올 거란 걸 알면서도, 씻거나 옷을 바로 입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못하셨나 보다. 아들이 어떤 사람을 데려왔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으셨나 보다. 과도를 휘휘 둘러가며 커다란 몸짓으로 자신의 서사를 풀어나가는 어머님의 이야기를 겉으로는 차분하게 들었지만, 마음속의 또 다른 자아는 ‘어서 이곳에서 도망가!’를 외치고 있었다.
어머님의 혼잣말이 20분쯤 이어지고 난 후, 방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시아버지가 부엌으로 내려오셨다. 비슷한 차림의 노인이었다. 그야말로 노인. 시어머니보다 28살이 많은 할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이자 나의 시아버지였다. 마음속의 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지금이야. 지금 아니면 못가. 도망가.’
물론 남편이 시부모님들을 만나기 전, 시어머니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시아버지의 나이가 얼만지도 다 이야기해 줬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과 실체를 마주 하는 것은 정말 달랐다. 씻었는지 알 수 없는 손으로 조물조물하다 건네주신 과일을 받아먹으며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과거의 남자친구이자 현재의 남편은 나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얘 지금, 시차 때문에 피곤하니깐 나중에 얘기해.”
“어, 그렇겠다. 얼른 가서 쉬어.”
시아버지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없이 웃으며 앉아계셨다. 귀가 어두워 잘 안 들리신단다.
우리의 침대가 마련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카펫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먼지 때문에 발을 디딜 때마다 재채기가 나왔다.
“자기, 실망했지? 도망가도 돼.”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그에게 내 생각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그는 샤워 후 입을 수 있는 로브를 챙겨주더니 지하에 있는 샤워실로 안내했다. 2층 샤워실이 고장 나, 차고에 있는 간이 샤워실을 써야 한다고 했다.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돌아와 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몸을 틀어 등을 돌렸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당시 한국 나이 서른셋. 결혼하겠다고 코로나 시국에 미국까지 왔다. 그해 가을 결혼을 하겠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스냅촬영 스케줄도 예약해 두었다. 회사에서도 노처녀의 반열에 오를 나를 위해 큰 배려를 해준 덕분에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당시 생소했던 원격 근무를 하기로 결재까지 받아두었다. 미국에 예비 시부모님을 보고 온다는 딸을 군말 없이 보내준 엄마, 아빠는 어쩌고?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이었는지. 내가 남자친구를 너무 사랑해서였는지.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그저 울면서 내 등에 딱 붙어 있는 예비 남편에게 말했다.
“아마 내가 엄청난 예술가가 될 운명이었나 봐. 사람은 시련을 겪어야 더 성숙해지고 강해지니까.”
어디서 주워들은 듯 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니, 그게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자 나에게 주어진 인생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 결혼해 휴스턴에서 살던 지난 1년은 재미있고 편안했다. 나름 쉬지 않고 치열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삶을 잠시 뒤로하고, 일 없는 백수로 지내는 것도 즐거웠다. 물론 영주권이 나오지 않아, 한국에 돌아갈 수 없었던 7개월간은 엄마, 아빠, 가족, 친구들이 보고 싶어 울기도 했었지만 내 옆에 늘 다정한 남편이 있었다. 같은 월급을 받으며 집세나 물가가 샌프란시스코의 절반 정도인 휴스턴에 살던 우리는 텍사스의 더위 빼곤 이겨내야 할 고난도 없었다.
1년을 휴스턴에서 보내고 나니, 어머님은 한국에 가시겠다며 샌프란시스코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하셨다. 물가가 비싸지만, 집세를 내지 않으면 아름다운의 자연과 아름다운 도시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남편이 버는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정도니 우리는 대도시행을 택했다.
샌프란시스코로 발령을 받은 후, 남편은 시어머니께 말했다.
“우리가 여기 살면, 사람이 살 수 있게 이 집을 고칠 거야. 그러려면 엄마 물건들 다 버려야 돼. 다 버려도 된다고 얘기해야 내가 여기 돈도 쓰고 시간도, 노력도 투자할 수 있어. 안 그럼 우리 다른데 집 얻어서 살 거니까 시작하기 전에 말씀하세요.”
“아우 몰라, 너네 알아서 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듣고 우리는 우리가 좋을 대로 해석했다. 쓰레기 집을 고쳐서 살아보기로. 시어머니가 오시면 사이좋게 잘 지내보기로. 시어머니께 깨끗하고 예쁜 집을 선물하기로.
그리고 4개월 후, 시어머니가 미국에 돌아오셨다. 본인 물건이 다 어디로 갔냐며, 왜 버렸냐며, 찾아내라고 난리셨다. 남편은 시어머니의 물건에 대한 애착에 진절머리가 났다. 어떻게 자식보다 물건이 더 중요하냐고. 그러기에 물건 없어지는 게 싫으면 집 고치기 전에 미리 말하라고 했지 않냐고 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자신이 찾던 물건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이성의 끈을 놓고 소리치셨다. 돌아오신 첫날을 빼고 3일간, 매일 고성이 오고 갔고 4일째 되던 날 우리는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남편과 결혼한 것이 내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선택했다. 돌아설 수 있을 때가 있었지만 나는 그냥 내 선택을 믿고 꿋꿋이 앞으로 나갔다. 그 덕에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내편이 잠들기 전 귀에 대고, “자기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사랑해.”라고 말해준다.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나에게 부드러운 인사를 건네는 남편이 고맙기만 하다. 내가 걸어왔던 길에서는 만날 수 없는 부류의 시어머니라는 사람을 만나 세상을 채우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면모를 직접 알아볼 수 있게도 되었다.
언젠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아마 그 꿈이 이루어졌나 보다. 물론 그때 내가 생각한 경험은 세계여행, 고공낙하 같은 멋진 일들만 포함하고 있었겠지만 세상이 돌아가는데 어찌 아름다운 일들만 있을 수 있겠는가.
자랑하고 싶은 모든 순간들이 개개인의 SNS를 도배하는 순간, 나는 내가 겪는 약간의 고생을 글로 써서 남길 수 있으니 시어머니가 준 시련이 예술가로 알려질 물꼬를 터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현 상황에 무너지지 않기 위한 자기 합리화나, 정신승리일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그녀를 탐구하며, 그녀가 어쩌면 나에게 준 선물을 제대로 파헤쳐 볼 생각이다.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찬 그녀의 인생사가 어떻게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는지. 그녀는 왜 지금의 그녀가 되었는지.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참혹한 지를 말이다.